금강산 레퀴엠 <11화>

싱가포르의 탐색전

by 니콜라테스

이 글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회사, 단체, 지명,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일부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열쇠구멍의 녹물



2000년 3월초 통일관광부 장관실

구정래 장관은 손가락을 깊게 맞잡고 상석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시선은 옆자리에서 무심하게 차를 마시는 김영규의 옆얼굴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구 장관이 정적을 깨고 낮은 목소리고 말했다.


“김 회장, 3월 9일에 북한하고 싱가포르에서 접촉을 하는데, 그때 시간 좀 내.”


예상치 못한 제안에 김영규의 찻잔이 크게 흔들렸다.


“아니, 제가 감히 그런 엄청난 자리에요?”


구 장관은 대답 대신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태산의 진명훈 회장말이야, 내가 보기엔 사업가라기보다 숫기없는 백면서생에 가깝던데. 네가 보기엔 어때?”


김영규는 찰나의 계산을 끝내고 비죽이 웃었다.


“역시, 형님 눈이 정확하십니다. 우리나라 최대재벌 회장이라지만 내성적이고 샤이해요! 기업가 스타일은 아니야. 어릴 때부터 공부는 엄청 잘 했어요. 왕 회장이 자랑스러워 했지. 그냥 교수하고 살면 딱인데... 형, 근데 그거하고 내가 가는 거 하곤 무슨 상관이에요?”


구 장관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네가 거기 나타나게 되면, 진 회장은 감을 잡을거야. 네 뒤에 내가 있는 걸. 너와 내가 어떤 무게로 엮여 있는지도. ” 그리고나서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에 갈 때, 태산 사람들하고 같이 가. 진 회장이나 이진수 부회장인가 하는 친구 있잖아? 네가 나하고 같이 가면 주변에 이목을 끌 수도 있고 모양새가 영 이상해. 태산 사람하고 같이 가.”


김영규는 다음 날 오전, 태산그룹 사옥으로 이진수를 찾아갔다.


“어제 구 장관 만났는데, 남북정상회담 문제로 싱가포르에 간다면서 자기를 표나지 않게 수행해 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진 회장님과 같이 가려고 전화했더니 벌써 출국하셨대. 부회장님이 저랑 같이 가시죠.”

이진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진 회장과 자신은 홍콩, 프랑스를 경유하며 첩보 작전하듯 움직이고 있는데, 정치 브로커인 김영규가 국가 기밀인 회담 일정을 꿰뚫고 있는 것도 모자라, 동행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구정래... 이 양반, 어디까지 판을 벌릴 건가?’


이진수는 김영규의 등 뒤로 드리워진 거대한 권력의 그림자에 왈칵 두려움이 들었다.


‘이 친구, 강갑철에 이어, 구정래까지...’


한편, 진 회장은 회담 하루전인 3월 8일 싱가포르로 입국한 후 요시다에게서 북쪽 인사들이 3월 9일 차질없이 예비접촉에 올거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이진수로부터 김영규도 싱가포르에 함께 왔다는 보고를 받자, 그의 얼굴은 차갑게 식었다.

“김영규가 여길 왜?”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비릿한 예감이 있었다. 강갑철과의 거래, 그 지저분한 연결고리였던 김영규. 그렇다면 구정래 역시 같은 갈래의 탐욕을 품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 회장은 목에 가시가 걸린 듯한 통증을 느꼈다. 남북의 닫힌 문을 열 열쇠가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믿었건만, 뜻밖에도 그 열쇠 구멍에서 권력의 추악한 녹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고수들의 체스판



2000년 3월 9일 오전 10시, 싱가포르 리츠칼튼호텔


진명훈 회장은 창밖의 햇살이 마치 칼날처럼 유리창을 때리는 호텔 라운지를 지나 회의가 준비된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대리석 바닥 위로 진 회장의 발걸음이 천천히, 그러나 결연하게 이어졌다. 평온한 관광지의 아침, 그가 입고 있는 짙은 감색 수트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지만 그의 심장은 어젯밤 내내 이어진 불면과 긴장으로 폭주 기관차의 엔진처럼 사정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거의 입에 대지 못한 그는, 커피 한잔으로 맑지 못한 정신을 부여잡고 있었다.


오늘의 만남은 단순한 예비 접촉을 넘어 훗날 누군가의 회고록에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비밀 외교의 기점’으로, 또 어떤 이의 일기에는 ‘음모의 시작’으로 남겨질 순간이 되리라는 것을 그는 진작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


오늘, 진 회장은 단순히 태산그룹 회장이란 직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누군가에겐 희망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협상용 카드였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탐욕과 수탈을 위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진 회장 스스로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진수, 요시다와 함께 협상장인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이진수는 평소보다 말수가 적어졌고,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의 입꼬리는 미묘하게 아래로 처져 있었다. 반면 요시다는 모든 감정을 속으로 삼킨 듯 무표정했다. 그의 얼굴에 동요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눈빛은 차갑고 단단했다.


남쪽에서는 구정래 장관이 국정원 김병윤 국장, 서치훈 과장과 함께 협상장에 들어왔고, 북쪽은 송호경 부위원장이 황철 참사와 실무직원 2명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모두가 입장하자 객실 문이 닫혔고, 이번 예비 회담을 성사시킨 진 회장이 호스트 입장에서 양측을 소개했다. 먼저 북측 송호경, 황철, 그리고 우리측 구정래, 김병윤 순으로 소개한 다음, 객실을 나왔다.

옆방으로 몸을 뺀 진 회장은 응접 의자에 몸을 던졌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역사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자신은 이 거대한 다리를 놓은 설계자였지만, 무대 위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당연히 ‘높은 분’들의 차지였다.


닫힌 문의 안쪽. 양측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서로를 응시했다. 단 한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으로 가득 찼다.


구정래는 이 회담이 흔히 있는 관행적인 만남이 아니며, 한반도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송호경은 온화한 성격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단단한 표정으로 구정래를 바라보았고, 상대의 숨결 하나까지 계산하려는 듯 눈꺼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회담장은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했으며, 고요한 폭풍이 방 안을 휘감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가 이미 말을 하고 있었다.


회담은 송호경의 부드럽고 차분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막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고, 억양에는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긴장된 상황을 해소하려는 의도 때문인지 담담하게 들렸다.


“구 장관께서는 고위층의 신임이 각별하시다고 들었는데, 참 대단하십니다. 비결이 뭡니까?”


구 장관은 송호경의 분위기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단어 하나하나 정제하며 응대했다. “그저 남들 하는 대로 충심을 다해 모셨을 뿐인데 우리 대통령님께서 좋게 봐주셔서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에 비해 신임이 그렇게 각별하지도 않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얼핏 보기에 상호 존중과 예의가 살아있는 담백한 외교적 표현처럼 들렸지만, 송호경은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공세적 배려를 구사했고, 구 장관은 수비적 정중함과 겸손함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마치 고수들의 체스판을 보는 듯 고도의 심리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송호경이 불쑥 “남조선 고위층은 진정으로 회담할 용의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차분한 연막을 뚫고 화살 하나가 날카롭게 날아든 것이다.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으나 도발과 탐색의 의미가 절묘하게 숨어 있었다.


그 순간, 회담장에 흐르던 공기가 변했다. 모든 시선이 구정래 장관에게 향했고, 그는 검지와 중지, 약지를 번갈아가며 테이블에 톡, 톡, 두드리고 있었다. 구정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몇 초간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뒤, 수차례 반복해서 준비해온 대로


“그렇습니다. 우리 대통령님께서는 남북간 상호 화해와 교류에 진심이십니다.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당연히 의지가 있으시구요.”라고 답했다. 언뜻 평범한 외교적 답변처럼 들렸지만, 그 속에는 무게감이 있었다. 그것은 대통령의 결단을 암시하는, 중요한 시그널이자 오늘 회담을 개최한 목적이었다.


그 의미를 간파한 듯 송호경이 곧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우리 상층부에 남조선 고위층의 의중을 보고드리겠습니다. 후속 논의는 내달 3월 17일쯤 중국 상해에서 다시 만나 이어가는게 어떻습니까?”


“우리도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그리고 오늘 논의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 상층부의 의지를 받아야 하니까 외부 발표는 하지 않는 것으로 합시다.”


“알겠습니다.”


싱가포르 예비 접촉은 당초 계획대로 김대진의 최측근인 구 장관과 김정일이 신임하는 송호경을 통해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서로의 의지를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고, 끝이 났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진명훈 회장은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눈을 감자 온몸이 깊은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듯한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나 그 피로감 뒤로 천근의 무게 같던 긴장감이 조금씩 걷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남북 협상은 사소한 한마디의 말로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그간의 대북사업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에 오늘 양측이 다음 회담 일정 합의까지 이른 것은 아주 의미있는 성과라고 생각했다.


첫 단추는 잘 꿰어졌다, 남북정상회담도, 무너져가던 태산의 회생 프로젝트도 이제 막 궤도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는 들뜨지 않았다. 회담이 끝난 뒤에 물밑으로 벌어지는 진실이 더 무섭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협상은 시작이 아닌, 그저 ‘탐색’에 불과할 뿐이다.


‘세상 일이 마음대로 되는 법이 없지... 그래도 좋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 회장은 그제야 비로소 창밖을 보았다. 화려하게 피어난 싱가포르의 야경이 그의 지친 눈동자에 들어왔다. 앞으로 건너가야 할 탐욕의 늪과 오해의 바다가 까마득했지만, 잠시나마 허락된 이 고요한 평온을 만끽하고 싶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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