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레퀴엠 <12화>

비극의 전조

by 니콜라테스

이 글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회사, 단체, 지명,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일부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카운트 어택


2000년 3월 12일 일요일 늦은 오후.

태산그룹 본사 14층, 태산자동차계열의 수장들이 모인 회의실은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진명기 회장의 측근, 이른바 ‘자동차 실세 5인방’이 한자리에 모였다.


안기태 태산자동차 사장, 원상현 미래전략본부장, 우충석 부사장, 연수한 미디어본부장, 그리고 오늘 이 긴급 소집을 요청한 송승직 경영지원실장까지, 그들은 커피잔을 앞에 둔 채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침묵의 벽을 깬 것은 송승직이었다. 그는 흥분을 애써 누르고 있었지만, 심리 상태를 대변하는 듯 얼굴은 붉게 홍조를 띠었고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휴일에 급히 모시게 되어 송구합니다. 화급을 다투는 사안이 생겨서 불가피하게 모이시도록 요청을 드렸습니다. 그동안 진명훈 회장님쪽 동향을 꾸준히 체크해 왔는데, 어제 심상치 않은 내용이 들어왔습니다.


저쪽 동향은 여러분들 모두가 아시다시피 태산건설과 해운, 전자 등 계열사들 경영 상태가 심각한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주가 하락에다 회사채 만기연장 차질 등 시장의 부정적인 반응이 계속해서 표출되고 있음에도 명훈 회장님은 계속 해외로 드나들고, 경영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분위기입니다. 출장 목적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다니고 있는 걸로 볼 때 대북사업 때문이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만, 상세한 내막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정도 내용은 사실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라고 입을 연 그는 어젯밤 입수한 첩보를 풀어놓았다.


“태산증권 이진수 부회장이 구조조정본부를 움직였습니다. 자기네들 계열사 경영 개선방안을 마련하라면서, 김태수 본부장을 따로 불러서 우리 자동차 계열을 명훈 회장 계열로 편입시키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를 내렸답니다. 이건 단순한 인사 개편이나 구조조정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문젭니다. 우리 계열의 운명, 나아가 진명기 회장님의 경영권, 그리고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모두의 생존과 직결된 사안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엔 향후 그룹 권력 구도와 주도권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대응 여하에 따라 전체 그룹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대응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안의 무게를 감안한 듯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원상현 본부장이 안경을 고쳐쓰며 입을 열었다. 학자 출신 특유의 신중하고 분석적인 말투였지만, 눈빛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음... 제 생각에는 저쪽의 상황이... 퇴로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 같습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문을 닫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겁니다.”라고 말한 다음, 주변을 둘러보고 “자구책이 없으니 우리를 가져가서 연명하겠다는 속셈 같은데, 꽤 신빙성이 있는 정보로 보입니다.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라며 말을 맺었다.


그의 말이 채 끝나자마자 연수한 본부장이 언성을 높였다. 얼굴은 이미 대추빛으로 검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가 당장 잘 아는 기자들을 통해 진위를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진명기 회장을 건드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그의 대응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조용히 앉아있던 우충석 부사장이 무게중심을 잡으려는 듯 차분하게 말을 했다. “감정적으로 대응할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진수의 도발이 사실이라면 대단히 심각한 사안이지만, 자칫 우리가 먼저 움직였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 있습니다. 진위 확인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의견을 경청하던 안기태 사장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말투는 나직하고 단정했지만, 말 속에는 계산된 냉철함이 베어 있었다. “여러분들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종합해 보면 지금의 사안이 매우 심각하고, 정보의 진위 확인도 필요하고, 그러나 시간적 여유는 별로 많지 않은 그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으로 테이블 위의 서류들을 천천히 정돈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정보의 출처와 경로, 그리고 지금까지 내부에서 보고된 흐름을 놓고 봤을 때, 사실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 사안에 접근할 때 경계해야 할 점은 분노가 아니라 방심입니다. 즉, 전략적인 관점과 냉정한 사고를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대원칙은 우리가 일사불란하게 단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안 사장은 회의실 전체를 천천히 둘러보면서 좌중을 압도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이 사안은 단순한 도발이 아닙니다. 태산그룹 전체의 중심축을 흔드는 중대한 리스크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밀리면 우리에겐 ‘다음’이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 상황의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한 설계 작업이 긴요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런 관점에서 각자 생각하는 실행 방안을 말씀해 주시죠.”


정치적 감각이 날카로운 기획통답게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하면서, 동시에 좌중의 의견을 수렴해 나갔다.


진명기 회장의 최측근으로 다혈질에다 직선적인 성격의 송승직이 한껏 목소리를 높이며 다그치듯이 말했다. “이진수 그 인간, 당장 명훈 회장 옆에서 치워야 합니다. 그 인간, 정상이 아니예요. 그룹 내에 사이코패스라고 소문이 자자한 사실은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계속 곁에 두면 또 어떤 짓을 벌일지 모릅니다. 당장 한직으로 내쳐야 합니다.”


그의 거칠고 단정적인 말투는 회의장 공기를 순간적으로 뒤흔들었다. 그는 의견을 나누려 하기보다 먼저 결정을 내리고 밀어붙이려 했다. 그러한 강경함 뒤에는 진명기 회장을 향한 절대적인 충성심이 깔려 있었다. 누가 반대라도 하려는 기색을 보인다면 그대로 부딪칠 기세였다.


원상현은 손수건으로 안경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지금은 지체할 때가 아닌 걸로 보입니다.”


연수한은 크고 두꺼운 손으로 주먹을 쥐고 흔들며 소리쳤다. “지금 당장 조치해야 합니다.” 그는 주저 없이 행동으로 돌입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우충석 부사장은 끝까지 신중을 기했다. “여러분들 말씀이 다 옳습니다만, 태산증권 인사권은 명훈 회장님 소관입니다. 우리가 이진수를 건드리면 명훈 회장님과 정면 충돌이 불가피합니다. 그 파장에 대한 대책을 먼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송 실장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대로 앉아서 당할 겁니까? 이 판에 이것저것 따지면 아무 것도 못하고 끝납니다! 상대는 벌써 수를 두고 있는데, 우리가 눈치만 보다가 다 잃고 만다구요. 카운트어택을 날려야합니다!” 그의 눈빛은 번뜩였고, 이미 상당히 흥분되어 있었다.


안기태 사장이 나섰다. “격앙된 심정이 이해는 됩니다만, 인사권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이진수를 일방적으로 발령내는 문제는 단순한 사안이 아니라는 점은 모두가 인정하실 겁니다. 생각을 좀 다듬기 위해 한 시간쯤 휴식하시고 다시 모이는 건 어떨까요?”


모두가 회의실을 나왔다. 원상현, 연수한은 송승직의 사무실로 같이 가고, 우충석 부사장과 안기태 사장은 각자 자신들의 방으로 갔다.


한 시간여가 지난 후 휴식이 효과가 있었는지, 다시 모인 자리의 공기는 아까보다 냉정하고 차분했다. 그럼에도 송승직이 또다시 거칠게 쐐기를 박으려는 듯 나섰다. “저들의 의도가 확실한 상황에서 시간만 끄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선제 공격만이 유일한 해답입니다.”


원상현과 연수한이 마치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마침내 안기태 사장이 결론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단호했고, 흔들림 없는 결단이 담겨 있었다.


“좋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떤 상황이 전개가 되든 끝까지 주도권을 쥐고 있어야 합니다. 그걸 잃는 순간, 게임은 끝납니다. 이진수를 그대로 둘 경우, 어떻게든 태산자동차의 경영권을 가져가려 할 겁니다. 진명기 회장님께서 그룹공동회장 권한으로 이진수를 인사 조치하면 인사권 시비야 일어나겠지만,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법적인 뒷감당은 우리가 하면 됩니다.”


이어, 진명기 회장의 의중을 가장 잘 아는 우충석 부사장을 바라보며 최종 확인을 구했다. “우 부사장님, 혹시 다른 의견 있으십니까?”


우충석은 짧은 침묵 후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죠.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이 최선인 것 같습니다.”


안기태 사장이 서류를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결연함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방향은 정해졌습니다. 회장님께 보고드리고 신속하게 결행합시다.”


일요일 오후의 태양은 어느덧 저물었고, 태산 본사 사옥 위로 ‘왕자의 난’이란 거대한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처럼 짙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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