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레퀴엠 <13화>

'왕자의 난' 발발하다

by 니콜라테스

이 글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회사, 단체, 지명,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일부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싱가포르의 새벽 전화



2000년 3월 15일.


싱가포르의 새벽은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채 느릿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리츠칼튼 호텔의 묵직한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든 희미한 빛이 방 안의 정적을 깨우기도 전, 침대 머리맡에 둔 핸드폰이 날카롭게 울렸다.


진명훈 회장은 납덩이 같은 몸을 일으켰다. 이틀 뒤로 다가온 상하이 회담 준비를 하느라 밤늦도록 서류들을 검토했던 터라, 눈꺼풀은 모래를 뿌린 듯 껄끄러웠고 머릿속은 안개가 자욱했다.


그는 유난히 오늘따라 자극적으로 울리는 전화기를 바라보며 잠시 멈칫했다. 이 고요를 깨고 찾아오는 이른 아침의 소식은 대체로 반갑지 않은 것임을 오랜 경영인의 감각으로 이미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찜찜한 기분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아…, 여보세요.”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온 대답은 며칠 전 실무 준비를 위해 귀국했던 이진수 부회장의 목소리였다.


“회장님, 저 이진숩니다. 이른 아침에 송구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뭔가 급한 듯 했고 불안정했다.


진명훈은 수화기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요? 이렇게 이른 아침에.”


“어제 밤, 진명기 회장님께서 저를 신라개발로 발령을 내셨습니다. 김태수 본부장이 인사권 시비를 제기하며 버텼지만, 이미 언론사에 보도 자료가 넘어갔고, 오늘 아침 자로 기사가 릴리스되었습니다.”


순간, 진명훈의 머릿속에 끼었던 안개가 순식간에 싹하고 걷히면서 차가운 현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신라개발. 이름은 그럴싸했지만 실상은 마땅히 할 일이 없는 껍데기뿐인, 소위 ‘태산의 유배지’였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명기 형님이 나하고 한마디 상의도 없이 당신을 그런 곳으로 보냈단 말인가? 그것도 정상회담 준비에 할 일이 산더미인 이 엄중한 상황에?”


진명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와 당혹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는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욕을 애써 참았다. 자신이 남북정상회담의 징검다리를 놓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사이, 형이 자신의 최측근 가신의 목을 친 것이다.


“일단은 … 이번 인사의 비하인드에 뭐가 있는지 알아보시오. 도대체 명기 형님이 왜 그런 강수를 던진 건지 낱낱이 파악해보란 말이오.”


그는 한숨을 크게 내뱉으며 덧붙였다.


“그렇다고 상하이 회의 준비에 차질이 있으면 안돼. 지금 우리에겐 그게 최우선이야, 알아들었소?”


전화를 끊고 객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진 회장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지나간 장면들이 엉킨 실타래처럼 풀려나왔다. 얼마 전 출국 직전에 이진수가 던졌던 그 서늘한 제안이 떠올랐다.


“태산자동차를 회장님 직할로 가져와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뺏어야 합니다.”


그때 왜 더 단호하게 그 입을 막지 못하였을까. 형님이 그 신호를 감지했다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이진수의 그 오만한 발언이 형님쪽 가신들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선전포고’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내가 그 입장이라도 그냥 있지 않았을 거야. 내가 너무 안이했어.’




턱 밑의 송곳



후회가 밀려왔지만, 그보다도 더 진명훈을 괴롭히는 것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명기 형의 기습 공격과 우리 형제간 균열이란 그 소동의 중심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이진수’의 존재였다.


며칠 전, 김태수 구조조정본부장이 찾아왔을 때의 표정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이진수로부터 태산자동차계열 합병을 은밀히 검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보고하던 그의 눈빛은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지닌 고통스러운 침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진 회장은 그날 김태수의 표정에서 말보다 더 확실한 메시지를 읽었다. 그건 충성된 부하의 강요된 침묵이었고, 곧 불어닥칠 폭풍을 예고하는 짙은 먹구름같은 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진수. 그는 충성과 위험의 양면을 야누스처럼 지닌 인물이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태산그룹에 입사한 후, 비서실을 거쳐 계열사들을 두루 섭렵하며 그가 쌓아올린 실적은 눈부셨다. 서류 한 장을 넘기면 오점 하나 없었고, 회의 석상에서는 누구보다 논리적이고 명민했다. 그러나 그 완벽함 뒤에는 늘 기괴한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저 친구는 전무 이상 올리면 안돼. 위험한 놈이야.”


언젠가 아버지가 하셨던 그 짤막한 경고가 이제야 진명훈의 심장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이진수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허구의 세계를 진실로 믿어버리는 기이한 구석이 있었다. 유리한 것만 편집하고 불리한 것은 철저히 배제하여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한 뒤, 그 허구의 논리를 밀어붙이는 자가당착적인 인물.


주변 동료들은 그의 정교한 논리에 긴가민가하다 결국 그가 설계한 함정에 빠져 희생양이 되곤 했다. 이진수에게 동료라는 존재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밟고 지나가는 징검다리에 불과했고, 지금은 진명훈이라는 거대한 징검다리를 딛고 태산의 정점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젠가 때가 오면, 주저하지 않고 나를 무너뜨릴 내 턱밑의 송곳.’


진명훈의 가슴에 가장 아프게 포착된 것은 이진수의 눈빛 이면에 숨겨진 지독한 열등감과 우월감의 혼재였다. 이진수는 겉으론 자신을 ‘회장님’으로 예우했지만, 속으로는 ‘아버지 잘 만나서 회장 자리에 앉아 있는 부잣집 도련님’이라며 비웃고 있음을 진명훈은 수차례 느꼈다.


‘내가 너희들보다 못한 게 뭐야? 너희들은 왕관을 물려받았을 뿐, 내가 없으면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


그 오만함이 이번 파동을 불러왔을 것이다. 그룹 전체를 뒤흔들어 권력의 지형도를 바꾸려는 준비된 신호탄. 우연이거나 단순한 사건이 아닐 수도 있는... 침묵 속에 깃든 흑심, 조용한 행보 뒤에 숨어 있는 은밀한 반역. 진 회장은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정교하게 설계된 반란의 무대 한가운데로 끌려 나온 것 같은 소름끼치는 상상이 뇌리를 스쳤다.


중압감이 다시 어깨를 짓눌렀다. 생각할수록 짜증이 솟구쳤다. 지금 코앞에 닥친 건 태산의 사활이 걸린 남북정상회담. 자신이 이 거대한 역사의 파도 앞에서 청와대와 싱가포르, 그리고 북측 라인을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도록 뛰고 있는 사이, 정작 발밑에서는 반역과 붕괴의 시나리오가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를 믿고 가야 하나? 이 위태로운 지뢰밭을 그와 함께 끝까지 건너갈 수 있을까?’


진명훈은 깍지 낀 양손으로 턱을 받친 채 두 눈을 감았다. 청명한 싱가포르의 아침 햇살이 창가를 때리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차가운 심해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 재벌 회장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슬픈 한 남자에 불과했다.


그의 입술 사이로 깊고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폭풍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고, 자신이 어디까지 휩쓸려 갈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진명훈은 힘에 겨웠고... 그러면서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13화금강산 레퀴엠 <1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