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레퀴엠 <14화>

난파선의 조타수

by 니콜라테스

이 글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회사, 단체, 지명,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일부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중 삼중의 트랩



2000년 3월 17일.


상하이의 공기는 겉보기에는 온화했다. 회담장의 대리석 바닥 위로 오가는 외교적 수사들은 마치 비단결처럼 부드러웠다. 아무래도 크게 충돌할 만한 이슈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았다.


구정래 장관은 2000년대를 맞이하여 남북간 대결 구도를 상생의 공존 관계로 변화시켜야 할 시점이 도래했다고 시대 전환의 급격한 흐름을 역설하면서, 그 배경으로 김대진 대통령 취임 이후 2년 동안 화해 협력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온 결과가 미국, 일본, 중국 등 관련국들의 전폭적 지지로 나타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런 만큼, 지금이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최적기라며, 조속히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교류 협력을 확대시켜 나가는 것이 남북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임을 주장하였다.


이어,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기본구상을 제시하면서 김대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으로 5-6월중에 평양을 방문하여 1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되, 2차 정상회담은 9월경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여 개최하며 앞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정례화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송호경은 1차 남북정상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하되, 구체적인 시기는 계속 협의하며, 2차 정상회담 문제는 1차 정상회담에서 결정하자고 주장하면서 김대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에 따라 이뤄진다는 사실을 명기할 수 없다는 조건을 걸었다.


구정래의 적극적인 공세에도 불구, 송호경이 계속 방어하고 거부함에 따라 양측은 초청자 명기 문제와 정상회담 개최 일정 문제에 대해 결국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렇지만, 송호경이 김대진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 내용을 언급하며 북한의 ‘경제 회복을 최대한 많이 도와달라’는 요구를 했고, 구 장관은 ‘정상회담이 잘 되면 비료와 쌀, SOC 모두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화답했다.


구정래는 무난한 워밍업이었다며 만족감을 나타냈지만, 진 회장의 촉은 달랐다.


무엇보다 송호경의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말투가 예전보다 거칠고 대담했다. 의례적인 완곡함을 배제한 채, 경제 회복 지원을 요구하는 태도에서 어떤 전략적인 의도, 즉, 흉중에 청구서가 숨겨져 있음을 간파했다.


상하이의 습한 밤공기 속에 돈 냄새가 조용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진명훈은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우호적인 협상 분위기 조성을 위해 세팅부터 의전 동선까지 하나하나 일일이 점검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복잡했고 어깨는 천근의 무게로 내려앉아 있었다. 서울에서 벌어진 인사 파동의 여진은 여전히 그의 심장을 갉아먹는 중이었다.


그는 호텔 라운지의 소음이 닿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이진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부회장, 서울에서 추가로 들어온 보고는 없나? 인사 비하인드 말이야.”


이진수는 미동도 없이 답했다.


“추가 액션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김태수 본부장에게 대응책을 준비하라고 했으니, 귀국하시면 결과물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진 회장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의 질문은 ‘왜’라는 배경을 향해 있었으나, 이진수의 대답은 ‘어떻게’라는 대책을 얘기하고 있었다. 질문의 본질을 비켜가는 그의 교묘한 회피에서 진 회장은 심증을 굳혔다. 그는 이 사태의 시나리오를 쓴 장본인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이 무대의 연출자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그는 이진수의 인사 문제는 접어놓고, 정상회담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이진수의 태도와 김영규의 손에 잡히지 않는 행보가 계속 마음에 거슬렸다.


특히 김영규는 싱가포르, 상하이에 이어, 북경까지 아무 역할도 없이 회담장 주변을 맴돌며 구정래 장관의 방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구 장관, 이 사냥개를 왜 아직 내 곁에 둔 거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셈이야?’

진 회장은 갈수록 가라앉고 있는 태산과 그 태산을 살리기 위한 대북사업, 거기에 건강이 좋지 못한 아버지의 각별한 믿음까지... 보이지 않는 부담감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이중, 삼중으로 설계된 거대한 트랩에 걸려있음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남쪽의 구정래, 북쪽의 송호경, 그리고 등 뒤의 이진수와 김영규. 누구하나 믿을 수 없는 이 미로 속에서 그는 태산이라는 침몰해가는 거함을 붙들고 필사적으로 노를 젓고 있었다.


‘결국은 내가 직접 풀어야겠지. 지금 고민해 봐야 딱히 답이 나올 것도 아니니까, 서울에 가서 풀자. 그리고 일단 북경 회담부터 잘 해결하고 보자. 그나저나 송호경, 이 양반은 도대체 어떤 카드를 들이밀려나...’




정상회담의 대가



2000년 3월 23일.


베이징의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금방이라도 폭우를 쏟아낼 것처럼 보였고, 회담장 안의 긴장은 폭발 직전의 보일러처럼 팽팽했다.


남북 양측은 상하이에서 합의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다시 논의하기 시작했다.


북측은 ‘남측의 희망을 고려해서 올해 편리한 시기에 김대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공식 요청한다. 평양 방문 날짜는 서로 합의해 결정하되, 실무적인 문제들은 차후 협의한다.’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에 반해, 남측은 ‘정상회담 일정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2박 3일간으로 한다. 초청자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명확히 표현한다.’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북측은 정상회담 시기를 6월 중순으로 하자고 한발 물러서면서도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당연히 김대진 대통령의 상대역이 될 것이지만, 북측의 외교 관례상 김정일 위원장을 합의서에 명기한 사실이 없어 그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개최 시기를 ‘6월 중순’으로 잠정 합의하며 간신히 접점이 만들어졌다고 안도하던 찰나, 송호경이 테이블 위로 폭탄을 던졌다.


“자, 우리 상층부에서 통 큰 결단을 내려서 남측의 정상회담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소. 그러니 그 대가로 캐쉬 5억불을 주셔야겠소.”


순간, 회담장은 시간이 멈춘 듯 침묵이 흘렀다.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구정래 장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5억 불이라니! 우리 정부가 그런 현금이 어디 있습니까?”


송호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비료도, 쌀도, SOC도 다 좋소.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이오. 5억불은 받아야겠소.”


송호경의 말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단호했다.


구 장관은 격분해 “아니, 다짜고짜 캐쉬를 5억불이나 달라니 이게 무슨 경웁니까? 우리 정부는 돈을 마련할 수가 없어요. 정 이렇게 나온다면, 정상회담이니 뭐니 모두 없던 일로 합시다.”


구 장관은 서류를 챙길 겨를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일순간 회담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진명훈이 맞닥뜨린 진짜 폭풍은 그 직후에 찾아왔다.


분노를 삭이지 못한 구 장관이 진 회장의 객실로 들이닥쳤다. 그의 눈에는 노골적인 질책과 책임 전가의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진 회장, 당신! 일국의 장관을 협상 테이블에 앉혀 놓고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는 거야! 일을 이렇게 밖에 못 해!”


구 장관의 호통은 진 회장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뭉개버렸다. 미안하다는 말로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구 장관은 “국가 중대사를 이따위로 하려면 당신, 앞으로 나 볼 생각 하지 마!”라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진 회장은 급히 복도로 뛰어나갔다. 멀어지고 있는 송호경을 붙잡아 다시 회담장으로 끌어들였다.


“부위원장님, 우리 정부에 돈을 달라고 하셨습니까?”라고 묻자, 송호경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비료, 쌀, SOC도 좋지만, 우린 현금이 필요하오. 5억불은 받아야겠소.”

진 회장이 간곡하게 설명했다. “우리 정부가 어떻게 돈을 줄 수 있습니까? 그건 정부 시스템을 아신다면 불가능한 얘깁니다. 우리 정부는 그렇게 줄 돈이 없습니다.”

그때 송호경이 기습적인 비수를 꽂았다. “태산도 사업권 대가로 10억불을 내놓으시오. 도합 15억불. 못하겠다면 정상회담이고 뭐고 여기서 끝냅시다!”


진 회장은 송호경을 붙잡으며 “그 문제는 제가 구 장관하고 논의해보겠습니다. 다음번 회담까지 답을 찾아 가져 오지요. 다음 회담 일정은 잡고 가시죠.”하고 묻자, 송호경은 “3월 29일 베이징.”이라고 쏘아붙이고는 휭하니 가버렸다.


15억 불. 그 숫자가 진 회장의 고막을 때리는 순간, 세상의 소리가 멀어졌다. 그것은 한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그건 태산의 심장을 꺼내 바치라는 소리와 같았다.


진 회장이 천장을 쳐다보며 크게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돌린 순간, 복도 끝에 그를 지켜보고 있는 이진수와 요시다, 그리고 김영규가 눈에 들어왔다.


당혹해하는 이진수와 무표정한 요시다 사이에서, 김영규만이 바지 호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무심한 얼굴로 발 아래와 천장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상해에 이어, 북경에서도 무시로 구정래의 방을 드나들며 진 회장도 모르는 회의 안건과 협상 결과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구정래와 모든 정보를 공유하면서도 모른체 하는 그 위선적인 무심함에 진 회장은 소름이 돋았다.


진 회장은 말없이 짐을 쌌다. 곧바로 일정을 당겨 귀국길에 올랐다.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 창 밖에는 잿빛 구름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그보다 더 짙은 안개속이었다. 북측이 돈을 요구할 것이라는 예감은 있었지만, 15억 불이라는 숫자는 예상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재앙 수준이었다.


그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누가 이 방정식을 풀 수 있을까...’


이 거대한 도박판의 주도권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난 듯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어지러운 국면을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또한 자신뿐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가문은 분열되었고, 가신은 반역을 꿈꾸며, 정권은 돈을 요구한다.


그 모든 파도의 정점에서 진명훈은 고독한 조타수가 되어 난파선의 흔들림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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