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회사, 단체, 지명,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일부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상상력을 가미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실제와 유사한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야수적 직관
2000년 3월 24일 저녁.
태산그룹 본사 14층, 태산자동차 회장실 안에는 진명기 회장을 중심으로 태산자동차계열의 운명을 짊어진 핵심인물 다섯명이 좌우로 나뉘어 앉아 있었다. 화려한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창밖과는 달리, 방안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진명기 회장이 담배를 한모금 깊이 빨아당긴 후 ‘휴 우~~’하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낮은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그의 목소리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처럼 투박했고 쇳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좌중을 압도하는 강렬한 카리스마가 깔려 있었다.
“음... 그래... 지금 상황이 어때? 말해봐. 대책도 같이.”
그는 항상 말이 짧았고 표현도 세련되지 못했다. 그런 그의 어눌한 말투를 놓고 세간에서는 경영 능력이 부족하다며 수군댔다.
하지만 그를 보좌하는 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 투박한 겉모습 속에 숨어있는, 사안의 핵심을 단번에 꿰뚫어보는 야수적 직관과 먹잇감을 포착하면 결코 놓지 않는 즉각적인 실행력을. 그는 화려하고 번지르르한 말로 포장하는 대신 핵심만을 정확하게 낚아채는 무서운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송승직 실장이 마른침을 삼키면서 보고를 시작했다. “조금 전, 진명훈 회장이 이진수 부회장의 인사를 무효로 돌렸습니다. 동시에…… 회장님을 그룹 공동회장에서 해임한다고 언론에 발표를 했습니다.”
“알고 있어. 그 다음은?”
진명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기태 사장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단순한 해임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진명훈 회장 쪽의 본심은 회장님의 계열 전체를 병합해 흡수하려는 겁니다. 이대로 갈 경우, 결국 회장님의 계열사 모두가 넘어가게 됩니다. 조속히 대응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진명기 회장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음... 예상했던 수순이군.”
진 회장의 말에 안기태가 덧붙여 설명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공동회장 해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생각보다 강하게 나왔습니다. 명예회장님의 재가까지 받았답니다.”
진 회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명훈이 그 녀석이 나를 쳐내는 게 꽤나 부담스러웠던 모양이군. 아버님의 재가까지 받은 걸 보니.”
원상현 본부장이 안경을 고쳐쓰며 대답했다. “회장님 말씀대로 진명훈 회장이 당연히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명예회장님이라는 거대한 방패를 내세워 우리 반격을 원천봉쇄하려는 속셈으로 보입니다.”
천천히 측근들을 둘러보던 진 회장의 시선이 우충석 부사장에게서 멈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어? 우 부사장 당신 생각은 어때?”
우충석 부사장이 신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회장님께서 공동회장을 계속 유지하시는 것이 전략적 측면에서 이번 사태의 승패를 가를 핵심 관건이라고 생각됩니다. 회장님께서 그 자리를 내려놓으시고 진명훈 회장의 단독 체제로 가는 순간, 우린 법적으로나 명분상으로나 사실상 무력화됩니다. 사수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진 회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충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수할 방법은?”
송승직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며 답했다. “회장님께서 명예회장님을 직접 찾아뵙고 결심을 뒤집는 것, 그것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한 번 내리신 결정을 바꾸실까? 그것 말고는 없어?”
안기태가 “예, 회장님 현재로서는... 저희들 생각이 거기까지 밖에... 죄송합니다.”
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 실장, 비서실에 연락해. 내일 아침에 아버님 뵈러 간다고.”
거인의 몰락
3월 25일 아침
송승직의 안색은 흙빛이었다.
면담 거절.
명예회장 비서실은 ‘왕 회장이 태산병원에 입원 중이시라서 면담이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방문을 차단했다. 당분간은 방문이 힘들며, 좀 나으시면 연락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말을 잘랐다.
송 실장은 명예회장 비서실이 강제로 면담을 막는 듯한 분위기를 감지했으나, 별달리 방법이 없었다. 진명기 회장에게 그대로 보고했다간 그런 사소한 문제 하나도 제대로 처리 못하느냐고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좌불안석이었다.
아침 6시 30분이면 출근해 그날의 일정을 꼼꼼하게 체크하는 진명기 회장이 아니나 다를까 9시가 채 되기도 전에 송 실장을 불렀다.
“아버님 방문 일정 어떻게 됐어?”
“아, 예... 지금 태산병원에 입원해 계셔서 어렵다고 합니다.”
“뭐? 입원? 어디가 불편하시길래 입원까지 하신 거야? 나에겐 아무 보고도 없었잖아! 야! 제대로 알아봐!”
진 회장의 호통이 복도를 울렸다.
“아, 예.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송 실장은 당황한 듯 허둥댔다.
“아냐, 됐어. 내가 바로 찾아뵈어야겠어. 병원장에게 지금 간다고 연락해!”
그는 굳은 표정으로 태산병원으로 향했다. 로비에는 병원장이 나와 있었지만 진명기 회장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차갑게 물었다.
“어디가 얼마나 안 좋으신 건가?”
평소 인품이 훌륭하다고 알려진 병원장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예, 저...”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진 회장은 냉혹하게 병원장의 말을 끊고 곧장 되물었다.
“이 중요한 일을 왜 난 모르고 있었지?”
“그게, 저...” 병원장은 진명기의 계속되는 추궁에 식은 땀을 흘리며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VIP병실 앞.
무전기를 귀에 꽂은 경호원 두 명이 잔뜩 날이 선 자세로 지키고 있었다. 진명기 회장은 병원장의 주저하는 태도와 경호원들의 자세에서 동생 명훈의 그림자를 읽었다.
짜증을 애써 참으며 문을 열고 들어선 병실은 분위기가 기묘했다.
진 회장의 인기척이 분명했음에도 왕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에 앉아 멍하니 TV만 쳐다보고 있었다. 브라운관에는 사자 일가족이 얼룩말을 사냥하는 ‘동물의 왕국’이 방영되고 있었고, 벽면 한쪽에는 같은 제목의 VTR 테이프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평소 아버지는 진명기 회장에게 경영수업을 시킬 때, 입버릇처럼 얘기했었다. “명기야, 기업을 하려면 사람을 알아야 해. 결국 기업은 사람이 하는 거거든. 그리고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동물들이 어떻게 사는지 봐라. 사람도 결국 동물이야, 본성이 똑같거든.”
야생의 사투가 펼쳐지는 그 화면과, 침대에 앉아 텅 빈 눈빛으로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슬프게 대비되고 있었다.
“아버님, 저 명기 왔습니다.”
왕 회장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흐릿한 동공 속에 아들의 실루엣이 맺혔다.
“응, 왔어? 웬 일이야?”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진명기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버지는 자신을 알아보았지만, 그 눈빛이 예전의 그 날카로운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맑지 못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버님, 저 공동회장 그만두라고 하셨다면서요? 정말 그러신 겁니까?”
왕 회장은 대답 대신 말없이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진명기는 긴장했다. 아버지가 내 말을 못 들은 건가, 아니면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무언의 압박인가.
그는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다시 물었다.
“아버님,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제가 사퇴해야 합니까?”
그러자 왕 회장이 천천히 고개를 다시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그 순간, 진명기는 확실하게 보았다. 아버지의 눈동자 위로 안개가 낀 듯 초점이 풀려있는 모습을. 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침대 옆에 앉아서, TV에 빠져있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아버지가 돌연 맑은 정신으로 돌아왔다.
“명기야, 네가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눈빛이 다시 번뜩였다.
진명기는 당혹감을 감추며 답했다.
“아닙니다. 편찮으시다고 해서 들렀습니다.”
“별일 아냐. 피곤해서 좀 쉬는 거야. 바쁜데 뭘하러 와.”
그것이 끝이었다.
아버지는 다시 ‘동물의 왕국’ 속으로 침잠했다. 왕 회장은 말이 없었고, TV에서는 사냥과 생존의 법칙이 무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진 회장은 병원장을 쏘아보며 물었다.
“언제부터 저러셨나?”
“심해지신 건 지난 달부터 입니다.”
“경호원들은 누가 보냈지?”
“예…… 진명훈 회장님께서.” 병원장은 끝까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진명기 회장은 주먹을 꽉 쥐었다. 명훈은 아버지의 흐릿한 의식을 이용해 자신의 목을 치려 했던 것이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병원장에게 지시했다.
“아버님 상태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돼. 보안 철저하게 하시오.”
진명기의 눈에 대한민국 경제의 오늘을 창조해 낸 위대한 거인이자, 자신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강했던 존재, 그가 지금 야생 속 한 마리 늙은 짐승처럼 슬프게 몰락하고 있었다.
그는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사태에 대해 냉정하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의 동물적 직관이 꿈틀거리며 예리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송승직에게 지시했다.
“아버님께서 나의 공동회장 복귀를 승인하셨다. 바로 후속 조치해!”
태산의 소용돌이
3월 26일 아침. 대한민국의 모든 조간신물 헤드라인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진명기 회장 태산 공동회장 복귀 선언’, ‘태산그룹 형제간 경영권 분쟁 본격화’, ‘태산그룹 왕자의 난 발발’, ‘왕 회장의 진심은 어디에? 뒤집힌 인사, 혼돈의 태산’
언론의 플래시 세례는 태산 본사를 넘어서 청와대, 국회는 물론 여의도 증권가에까지 번져 나갔다. 주식시장에서 태산의 주가는 롤러코스트처럼 널뛰었고, 경제부처들은 태산그룹의 신용등급 변동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금융 당국 또한 긴급 대출 한도 조정 검토에 들어갔다.
진명기와 진명훈, 두 형제는 이제 루비콘강을 건넜다. 누구 하나가 쓰러지거나, 제국이 반으로 쪼개지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대한민국 경제 지도를 바꿀 거대한 폭풍이 이제 막 거친 회오리를 일으키면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진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