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레퀴엠 EP #7
스위스은행 계좌의 의미
이 글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회사, 단체, 지명,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일부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독이 든 성배
2000년 1월 하순.
정상회담을 향한 남북 수뇌부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할 무렵, 태산그룹 진명훈 회장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금강산 카지노 허가는 안개 속에 갇혔고, 대북사업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하루하루가 벼랑 끝이었다.
그때, 김영규를 통해 강갑철 고문이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1년 넘게 침묵하던 노정객의 호출, 진명훈의 뇌리에 서늘한 예감이 스쳤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는 이 위기를 카지노 허가를 위한 지렛대로 삼으리라 다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후 5시, 다이너스티 호텔 커피숍.
겨울의 짧은 해는 이미 저물어 사방에 어스름이 잔뜩 깔려 있었다. 이진수 부회장을 대동한 진명훈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조명이 가장 어두운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강갑철과 그의 충견 김영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 회장, 사업은 좀 어떠시오?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어요.” 강갑철이 친근한 말투로 운을 뗐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만, 상황이 녹록치 않습니다.” 진명훈이 공손히 대답했다.
강갑철이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카지노와 면세점 허가가 빨리 나야 금강산 관광이 활기를 띨 텐데… 그래야 남북 평화의 물꼬가 트이는 것 아니겠소?”
진명훈은 기다렸던 얘기가 나오자 곧바로 말을 받았다. “고문님께서 도와주시면 천군만마가 될 것 같습니다.”
강갑철은 거드름이 잔뜩 깔린 목소리로 “알겠소, 내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리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헛기침으로 주변이 공기를 바꾼 다음, 목소리를 한 옥타브 낮췄다.
“그런데 말이오, 진 회장... 총선이 코앞인데 우리 당 사정이 말이 아니오. 태산에서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우리 당이 살아야 대북사업도 힘을 받을 거 아니오. 좀 도와주시오… 구체적인 건 김 회장과 상의하고.”
진명훈은 속으로 ‘역시 공짜는 없어. 예상했던대로 독이 든 성배를 내미는군. 하지만 내게 마시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있나…’라고 씁쓸한 판단을 내렸다.
“그럼요. 도와 드려야지요.”
강갑철은 만족스러운 듯 짧게 미소 짓고는 “그럼, 진 회장만 믿겠소.”라는 말을 남기고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하려는 진명훈을 손짓으로 만류하며 홀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은, 먹잇감을 잔뜩 포식하고 떠나는 늙은 사자처럼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강갑철이 떠난 자리, 김영규가 본색을 드러냈다.
“고문님이 얼마를 말씀하시는 거야?”라고 진 회장이 묻자, 그는 이런 거래가 일상인 양 덤덤하게 액수를 뱉었다.
“3천만불 말씀하시던대요. 계좌번호는 제가 따로 받아다 드릴게요.”
진 회장은 “그래... 번호 받아서, 이 부회장에게 줘. 내가 처리하지.”
며칠 뒤, 이진수가 김영규에게 받아온 거라면서 쪽지를 건넸다.
익숙치 않은 활자들이 적혀 있었다.
‘CH93 OOOO 0987 OOOO, Swiss Txxxx Uxxxx, Zürich’
그는 보는 순간 바로 알았다. 스위스은행 계좌였다.
독재자의 금고이며, 부패 권력자의 최후의 보루. 세계 최정점의 비밀주의와 불투명 자본의 상징.
진 회장은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역사의 뒤편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음모에 말려 들었음을 직감했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림이었다. 온갖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배신자와 하이에나
‘총선 자금이라더니 왜 달러를? 그것도 스위스은행에... 강 고문은 분명 총선 자금을 요청했잖아, 이거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데... 총선용 자금이 맞나? 이 계좌의 진짜 주인은 누구야?’
총선과 달러, 그리고 스위스계좌. 이 조합은 아무리 생각해도 퍼즐이 맞지 않았다. 진 회장의 상식으로는 '총선과 현금, 직접 전달', 또는 '달러, 북한, 스위스계좌'라는 모자이크가 어울렸다. 몇 번을 고쳐 생각해도 이건 이해하기 힘든 요상한 구조였다. 강 고문과 자신 사이에 이해하기 힘든 간극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명훈의 머릿속에 퍼뜩 김영규와 이진수가 떠올랐다.
이진수가 1989년에 김영규를 자신에게 처음으로 소개했으니 적어도 둘은 10년이 넘는 친분이 있어왔음에도 자신 앞에서 애써 친하지 않은 척 행동하는 걸 볼 때마다 참 어색하고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김영규가 누구인가, 정치인 강갑철의 돈 심부름꾼 아닌가. 정치인 옆에 붙어 비자금을 세탁하고 관리하는 '전문가'. 말 그대로 사냥하지도, 피 흘리지도 않으면서 고기를 뜯어 먹는 전형적인 하이에나같은 인물. 그리고, 자신의 최측근이나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요주의 인물 이진수...
'혹시... 둘이 작당해서, 해외로 자금을 빼돌리는 건 아닐까?' '강갑철이 그렇게 허술하진 않을텐데...' 진 회장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강갑철과 김영규, 이진수 세명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했고, 알아낼 방법도 없었다.
돈을 보내는 이는 자신이지만, 돈을 받는 자가 누구인지 묻지도 못하는 구조. 갑작스런 공포가 피부를 타고 번져왔다.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초현실적 상황이 실감 나지 않았다.
진명훈은 기업인이었다.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해법을 찾고, 정권의 불확실성 앞에서도 회사를 지켜내야 하는 책임을 감당해 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건 도박이고, 굴욕이며,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이었다. 태산을 구한다는 명분에서 출발했지만, 오히려 태산을 늪으로 밀어 넣고 있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 아니, 길을 잃은 건가?’
훗날 모든 것이 드러날 때, 권력자들은 안개 속으로 사라질 것이고 만신창이가 된 채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는 사람은 자신이 될 것이었다. 언론의 헤드라인은 ‘기업인의 야망’이 아니라, ‘회장의 비리’로 도배될 것이다.
자신이 천길 낭떠러지에서 추락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는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접어 품속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태산을 살릴 유일한 동아줄은 그것 뿐이었기에.
진명훈은 태산해운 고석찬 사장을 불렀다. 다른 계열사들에 비해 그나마 자금 숨통이 조금 나은 곳이었고, 대북사업의 실질적인 돈줄이기 때문이었다.
“고 사장, 총선과 대북사업, 그리고 우리의 생존이 걸린 문제를 풀어 보려 해. 여기 적힌 계좌로 3천만불 좀 보내.”
고석찬은 진 회장의 말에 맥이 빠졌지만, 진 회장도, 회사도 위험한 줄타기를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렵지만, 만들어 보겠습니다.”
사무실로 돌아간 고석찬은 곧바로 자금담당 임원을 불렀다. 사무실 문은 조용히 닫혔고, 커튼은 반쯤 내려졌다.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회장님 지시야. 이건 아주 민감한 사안이야. 미주 본부를 통해서 3천만불을 이 계좌로 송금해. 수명이 다한 중고선을 판 걸로 하든지, 신규 선박을 매입한 걸로 하든지, 철저하게 분식을 해. 흔적은 최소화하고. 그리고 말야, 송금이 끝나면 송금 영수증은 미국의 내 사무실 비밀금고에 넣어 두라고 해.”
임원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지만, 곧 차분하게 바뀌었다. “알겠습니다. 처리하겠습니다.”
며칠 후, 고석찬에게서 송금을 완료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진명훈은 비서가 커피를 내오고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회색빛 도심이 내려다보였다. 개미처럼 움직이는 자동차들 사이에 자신도 끼어 어디론가 휩쓸려가는 기분이었다.
“정상회담은 아직 시작도 안 했고, 카지노도 여전히 제자리 걸음인데... 승냥이들이 벌써 달려드네.”
씁쓸한 냉소가 흘러나왔다. 체념과 억눌린 분노가 가슴 속에 뒤섞여 끓어 올랐다. 대북사업을 매개로 한 이 거래가 처음엔 각자 이익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시작되지만, 결국에는 정치권의 권력 유지와 이해득실로 소비될 것이며, 자신은 단지 그 기계 장치의 부속품에 불과하리란 것을 부정할 수 없었고, 굳이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태산의 회생이란 목표만 달성하면 될 뿐이었다.
‘난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이젠... 내릴 수가 없어.’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그는 어둡고 초췌해 진 얼굴을 쳐다보며, 자신이 전체 판을 주도하는 킹이 되고 싶었지만 이미 권력자의 손가락 끝에 움직이는 ‘졸(卒)’로 전락했음을 처절하게 깨닫고 있었다.
진명훈과 태산은 그렇게 정경유착이란 탁한 격랑 속을 급격한 속도로 떠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