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레퀴엠 EP #6

탐욕의 수레바퀴

by 니콜라테스

이 글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회사, 단체, 지명,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일부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폐쇄된 권력의 허락



진명훈 회장으로부터 북한 수뇌부의 남북정상회담 추진 의중을 파악하라는 극비 지시를 받은 요시다. 그는 김정일의 수행비서 전희정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수개월째 이어지는 침묵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은 독처럼 그의 온 몸에 퍼져 나갔고, 이진수의 집요한 확인 요청은 그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다.

가을이 저물고 겨울의 긴 그림자가 땅을 덮기 시작하던 11월 중순, 마침내 전희정의 회신이 도착했다. 연말에 평양으로 들어오라는 짧은 전갈이었다.


1999년 12월, 요시다는 도쿄를 떠나 북경을 거쳐 평양행 고려항공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내부는 허덕이는 북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박제해 놓은 듯했다. ‘강성대국’이란 구호는 낡고 비좁은 좌석과 군데군데 살점이 떨어진 듯 벗겨진 바닥재 밑으로 숨어버렸다. 중국에서 국경을 넘어 평양으로 오는 창밖 풍경은 더 처참했다. 회색과 갈색이 뒤섞인 채 헐벗은 산천은 생명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곳은 폐쇄와 감시가 일상화된 거대한 감옥이자, 얼어붙은 동토의 왕국이었다. 요시다는 지금 그 얼어붙은 체제의 심장부로 들어가고 있었다.


익숙한 공기였지만, 마중 나온 북측 인사들의 차가운 안내를 받을 때마다 그는 자신이 ‘감시’와 ‘신뢰’라는 위태로운 외줄 위에 서 있음을 실감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노동당 1호 청사로 들어서자, 전희정이 요시다를 맞이했다. 수십년간 그림자 인생을 살아온 독재자의 최측근. 요시다는 차가운 인상의 그와 마주할 때마다 과거 진태양 회장의 방북 때부터 쌓아온 세월의 무게가, 오늘 그를 지탱해 주고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요시다는 다소 서툰 한국말로 신중하게 운을 뗐다.


“비서 동무, 남조선에서 조용히 남북정상회담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위원장님의 결심을 여쭙고자 왔습니다.”


전희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담담한 자세로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으나 방 안의 냉기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전희정의 무표정한 눈은 요시다의 눈동자 너머, 그의 뒤에 숨은 남조선의 권력자들을 꿰뚫어 보려는 듯했다.


‘남조선 정권이 결국 패를 던졌구만.’


전희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북한의 입장에서도 고난의 행군 이후 무너져 가는 체제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인민들의 불만을 잠재울 돌파구가 절실했다. 하지만 궁색한 지경에서 부자의 발에 입을 맞춘다해도 자존심은 챙겨야 하는 법.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요시다 동무, 장군님의 결심은 동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무겁소. 남조선의 그 가벼운 입방정들과 비교할 수 있는 그런 사안이 아니란 말이오.”라고 말하고는 잠깐 생각을 다듬는 듯 한숨을 내쉰 뒤, “내가 직접 장군님께 보고드리고 답을 주겠소. 조금 기다려 보시오.”


말투는 딱딱했으나, 요시다는 그의 눈에서 찰나의 흔들림을, 그의 목소리에서는 미세한 떨림을 읽었다. 요시다는 이 중대 사안을 보고받은 독재자의 판단에 따라 자신의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전희정의 본능적인 공포심을 엿보았다.


그날 밤, 요시다는 두꺼운 커튼으로 외부의 시선을 완벽히 차단한 숙소에 홀로 앉아 있었다. 자신의 숨소리조차 소음처럼 들리는 적막. 이 정적과 긴장감은 이제 익숙할 때도 되었건만 도대체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때, 숨막히는 고요를 깨는 둔탁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회색 인민복 차림의 전희정이 서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곧바로 거두절미하고 결론을 던졌다.


“요시다 동무, 위대하신 장군님께서 결단을 내리셨소.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소. 남조선 대표로 안기부는 절대 안되오. 그런 야수 같은 놈들하고는 상종을 안한다는 것이 장군님의 단호한 뜻이오.”


안기부를 배제하라는 조건은, 자신들의 방어 능력으로는 역부족인 남측의 예리한 정보 공격을 원천적으로 차단함과 동시에 ‘자신들이 통제 가능한 비선’만을 상대로 판을 흔들어 주도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겠다는 고도의 심리전에서 나온 것이었다.


요시다는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장군님의 결단'이라는 말에서 전율과 안도감이 동시에 심장을 넘어서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바로 폐쇄된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온 허락이자,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지상 명령을 의미하고 있었다.




저울추와 주판알


2000년 1월 초, 서울.


요시다는 진명훈 회장과 독대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의중을 확인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허락했습니다. 다만, 안기부를 전면에 내세우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진 회장은 북측이 제시한 조건을 곱씹었다. 그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했다. 국가 차원의 외교적 판단에 앞서, 태산의 카지노 사업권이라는 실리적 이해관계가 그의 저울추를 움직였다. 그는 결국 정상회담을 논의할 대상으로 국정원이 아닌 구정래 장관을 선택했다.


일주일 후, 피아자호텔. 진 회장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구정래 장관에게 신중한 톤으로 입을 열었다.


“북한에서 정상회담에 응하겠다는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구 장관은 테이블 위에 놓인 물잔을 들어 입술을 축인 뒤,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건 나한테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국정원이 다룰 사안 아닙니까?”


진명훈은 구 장관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만날 때마다 느끼는 이 불쾌한 불신감. 하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이용해야 했다.


“북에서 국정원이 전면에 나서는 걸 극도로 꺼리고 있습니다. 대통령님께 직접 말씀드려야 할 사안이라면, 장관님께서 그 통로가 되어주시는 게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태산은 그간 대북 문제를 국정원과 협의해 왔으나, 이 문제 관련해서는 새로운 ‘교통정리’가 필요한 시점으로 보입니다.”


“국정원을 전면에 내세우지 마라…”


구 장관은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 주판알은 이미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게 이 조건은 ‘기회’였다. 이 거대한 역사적 이벤트의 모든 공로와 정보를 자신이 독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리고 그는 진명훈의 절박함을 읽었다. 카지노 사업에 목을 매고 있는 태산그룹 회장. 구정래는 그런 진명훈을 장기판의 졸처럼 십분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 장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고민해보고 답을 드리지요.” 물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가하는 차 안. 구정래는 계속해서 정치적 셈법을 굴리고 또 굴렸다. 이 일을 맡게 된다면, ‘남북정상회담의 주역’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훈장을 달겠지만, 동시에 ‘비선 실세’라는 위험한 표적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야망은 두려움보다 뜨거웠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다음 날, 청와대. 구정래는 김대진 대통령 앞에 섰다.


“대통령님, 태산그룹 진명훈 회장을 통해 확인한 내용입니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에 긍정적인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순간, 김대진 대통령은 책상 위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한참 동안 창밖의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능하다면... 한 번 추진해 보시오.”


짧은 한마디였으나 그 안에는 거대한 해일이 일고 있었다.

대선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임기 후반, 정국의 주도권을 단숨에 틀어쥐고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각인시킬 결정적 기회. 성공할 수만 있다면, 한반도 평화를 이끈 대통령으로 노벨평화상이라는 불멸의 영광도 가시권에 들어올 터였다.


그는 겉으로 무심한 척 했지만, 가슴은 이미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남북정상회담은 국민 여론과 언론, 국제정세까지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강력한 ‘조커’였다. 다만, 실패했을 때의 후폭풍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끝까지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그날 이후, 꽁꽁 얼어붙었던 한반도의 시계추가 아주 느리게, 그러나 단호하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채.

다음날, 진명훈 회장은 구 장관에게서 짧은 확답을 받았다. “내가 맡기로 했으니, 추진하시오.”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그렇게, 누군가의 진심과 누군가의 탐욕을 싣고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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