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창조의 본질: 표현과 합일
희극성의 발견 이후, 인간은 무의미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세계와 일시적 합일을 체험하는 창조 행위를 수행하게 된다. 창조의 두 핵심 기능은 다음과 같다.
표현(Expression): 세계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드러낸다. 그러나 그 무의미 속에서도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의미를 발명한다.
합일(Union): 창조 행위를 통해, 인간은 세계와 자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감각을 경험한다. 창조는 세계와의 긴장 없는 동행이자, 흐름 속 합일의 체험이다.
요컨대, 창조란 세계의 무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위에 순간적 빛을 새기는 행위다.
6.2 창조의 이중성: 범죄의 씨앗
그러나 창조는 단순한 표현이나 합일에 머물지 않는다.
모든 창조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형식을 낳는다.
의미를 발명하는 순간, 그 의미는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고, 형태는 시간이 지나 규범이 된다. 규범은 다음 세대에 기대를 강요하고,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을 초래할 수 있다.
즉 창조는 무의미를 잠시 채우는 자유 행위인 동시에, 장차 타인을 구속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론적 범죄(Ontological Crime)이기도 하다.
존재론적 범죄의 필연성은 다음 사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 제국 아래에서 억압받는 소수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의 약속을 줬다. 그러나 국교가 되면서 교리의 절대화, 이단 탄압, 도덕적 규범화가 이루어졌고, 결국 억압의 도구가 되었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고 시민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탄생했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도 여론 조작, 다수의 폭력, 정치적 올바름이나 사회적 배제 등 비형식적 억압이 현실화되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지만, 그의 삶은 평생 고독과 광기의 경계에서 흔들렸다. 그는 초인을 꿈꾸었지만, 그 초인이 현실에서는 우월주의적 이상형으로 오용되었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의지와 표상으로 설명했지만, 결국 인간 의지가 초래하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 모두는 무의미를 직면했지만, 그들의 사상은 새로운 의미 체계로 전환되어, 또 다른 구속의 토대가 되었다.
6.3 존재론적 범죄: 창조의 그림자
‘존재론적 범죄’란, 자유를 위해 창조한 형식이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구속과 억압을 만들어내는 필연적 구조를 말한다. 이는 의도적인 악행이 아니다.
오히려 창조가 창조 자체의 본질로서 필연적으로 낳게 되는 결과다.
요컨대 인간은 창조하는 순간, 자신이 거부했던 질서 너머의 새로운 질서를 빚어내는 데 무의식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6.4 창조와 죄책감
창조적 수용은 존재론적 자유를 긍정하는 행위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규범과 질서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이 세상을 해방하려는 동시에, 또다시 세상을 얽매이는 질서를 창조할 수밖에 없음을 자각해야 한다.
이 인식은 존재론적 죄책감(Existential Guilt)을 동반한다.
존재론적 죄책감의 본질은 단순히 도덕적 죄책감(잘못했음)이 아니다. 인간 존재가 창조의 순간에 본질적으로 자유를 열면서 동시에, 미래의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자기모순을 품는 데서 비롯된다.
부록: 미성숙한 반출생주의
나는 한 반출생주의자와 토론한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며, 출산은 그 고통을 ‘낳음 당한’ 존재에게 전가하는 행위다. 그렇기에 인간은 더 이상 번식해서는 안 된다.” 이 논리는 정연했고, 실제로 삶이 고통을 수반한다는 점에는 나도 이견이 없다. 하지만 나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삶은 고통의 재생산일 수 있다. 그리고 출산은 분명,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론적 범죄일 수 있다. 선택하지 않은 자에게 고통을 떠안긴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나는 그 죄를 기쁘게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은 고통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고통 속에서조차 창조와 의미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나는 그 가능성을 믿는다.
자녀를 가지는 것은 완전무결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책임과 모순, 그리고 창조의 두려움을 동시에 품는 선택이다. 나는 이 선택이 삶을 긍정하는 방식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반출생주의의 이와 같은 논리는 고통에 대한 예민한 성찰이지만 미성숙하다. 고통 속에서도 창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야말로 존재론적 성숙의 핵심이다. 나는 그 길을 택하고자 한다.
부록: 창조의 범죄성과 비관주의에 대한 반론
창조가 새로운 규범과 억압의 씨앗이 된다는 논지는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본 글은 창조를 부정하거나 저주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창조의 본질적 모순을 인식함으로써, 창조자는 스스로의 행위를 경계하고, 지속적으로 창조를 갱신하고 새롭게 할 수 있다. 창조는 억압의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이 인식을 통해 창조자는 스스로를 정체시키지 않고, 영원한 재창조의 흐름 속에 존재할 수 있다.
6.5 퇴폐적 아름다움의 수용
창조자는 순수하고 고결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비극, 상처, 모순, 퇴폐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는 완전하지 않고, 인간의 창조 역시 결코 순수하지 않기 떄문이다.
퇴폐적 아름다움(Decadent Beauty)은, 무너짐 속의 아름다움, 실패 속의 의미, 붕괴 속의 빛을 사랑하는 감수성이다.
존재적 성숙은 순수한 세계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부패하고 찢긴 세계를 끌어안고도 창조를 멈추지 않는 용기다.
순수한 아름다움은 완결과 이상을 전제하지만, 퇴폐적 아름다움은 불완전성과 덧없음을 수용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실상을 더 깊이 긍정한다. 퇴폐적 아름다움은 완전성과 순수성이라는 환상을 거부한다. 그것은 찢긴 것, 실패한 것, 무너진 것 속에서조차 생명성과 표현성을 발견하는 감수성이다. 진정한 존재 긍정은, 오직 깨끗하고 고결한 것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세계와 불완전한 자기 자신까지도 끌어안는 데서 완성된다.
6.6 요약
창조는 무의미의 표현이며, 세계와의 합일을 체험하는 행위다.
그러나 동시에 창조는 새로운 규범의 씨앗을 심는 존재론적 범죄다.
창조자는 이 범죄성에 대한 존재론적 죄책감을 짊어진다.
그는 순수한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퇴폐적 아름다움까지 수용해야 한다.
존재적 성숙은 이 모순을 의식하고도, 창조를 계속 이어가는 태도다.
부록: 창조적 수용은 이상주의가 아니다
창조적 수용이라는 태도는 극히 일부 소수의 인간만이 가능한 이상적 상태일 뿐, 대다수 인간에게는 비현실적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본 글은 창조적 수용을 인간 존재의 일반 규범으로 강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2차 비극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에게 열려 있는 하나의 가능성, 존재 양식으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창조적 수용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지만, 인간 존재의 깊이를 증명하는 하나의 경로로 존중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