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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몽당연필 May 26. 2024

할머니의 숨비소리 (1화)


 “우리 강아지, 잘 잤는가? 어디 보자. 아직 미열이 있네.”

 나갈 채비를 하던 할머니가 비릿한 냄새가 밴 손으로 내 이마를 더듬었다. 소반 위에는 전복죽 두 그릇이 놓여 있었다. 고소한 참기름 향이 진동하는 소반 앞에서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요거 한술 뜨면 고까짓 열, 싹 달아날 거다. 할망 물질하고 올 테니 후후 불어 남기지 말고 한 그릇 다 먹으라겐. 하르방 깰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으라이. 알았지?”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숟가락을 들어 전복죽 윗부분부터 살살 떴다. 엄마가 죽이나 수프를 먹을 땐 숟가락을 쑥 집어넣지 말고 윗면부터 긁듯이 떠먹어야 안 뜨겁다고 했다.

 할머니 전복죽은 푸르스름했다. 엄마가 마트에서 사 온 전복죽은 분명 하얬는데. 고소하고 간간한 할머니의 푸른 죽이 천 배, 만 배는 더 맛있었다. 숟가락이 그릇 바닥에 닿자, 나는 곁눈질로 할아버지 몫의 남은 죽 한 그릇을 흘끔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죽에서 폴폴 피어오르던 김이 진작에 사라졌는데 할아버지는 언제 일어나시려는 걸까.

 나는 대자리 위에 엎드려 스케치북을 펼쳤다. 백지 제일 위에 ‘우리 가족’이라고 쓰고 왼편엔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고 있는 엄마를, 오른편엔 살며시 미소 짓는 아빠를 그렸다. 엄마 입술을 빨강으로 채우고 아빠 턱에 까끌까끌한 수염을 예닐곱 개 찍었다. 나는 어디에 그려 넣어야 하지? 엄마 옆에? 아빠 옆에? 엄마와 아빠 사이에? 나의 위치를 고민하며 애꿎은 대자리에 손톱자국만 내고 있는데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칼보다 턱수염이 더 길게 자란 할아버지가 방에서 비척비척 걸어 나오더니 화장실로 들어가 ‘크아악, 퉤!’하고 요란하게 가래를 뱉었다. 끊어질 듯하다가 이어지길 반복하는 오줌 소리를 들으며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할머니가 이거 드시래요.”

 소반 앞에 앉은 할아버지 가까이로 전복죽 그릇을 밀었다.

 “이놈의 여편네, 국이나 한 사발 시원하게 끓여 낼 일이지.”

 흰자위가 벌겋게 충혈된 할아버지가 미간에 세로줄을 만들며 불퉁하게 말하는 바람에 내 목이 한 뼘이나 기어들어갔다. 그런 나를 보고 할아버지는 눈꼬리를 내리고 말했다.

 “예솔아, 하르방 방에 가 티비 볼커냐?”    

 아까부터 내심 기다렸던 말이다. 텔레비전이 할아버지 방에 있어서 내 마음대로 ‘얼음 공주의 대모험’도 못 보고 ‘꼬마 마법사 레미’도 못 봐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할아버지 요 위에 누워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코를 찌르는 냄새에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정리되지 않은 요와 이불에 고릿하고 쾨쾨한 할아버지의 체취가 빈틈없이 배어 있었다. 그래도 ‘얼음 공주의 대모험’ 본방송은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입으로만 후하후하 숨을 쉬며 텔레비전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잠시 후, 열린 방문 밖에서 할아버지가 가래 끓는 소리로 나를 불렀다.

 “예솔아, 이리 와 보라겐. 이걸로 저 아래 생생슈퍼 가서 탁배기 세 병만 사 오라이.”

 “탁배기요? 탁배기가 뭐예요?”

 “주인 여자한테 대장 할망집에서 왔다고 하면 알 거다. 남는 돈으로 예솔이 과자 하나 사구.”

 할아버지가 바지춤에서 꼬깃꼬깃한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얼음 공주를 괴롭힌 악당의 정체가 이제 곧 드러날 때가 됐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젤리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텔레비전을 끄고 발딱 일어나 생생슈퍼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줌마, 대장 할망집에서 왔는데요, 우리 할아버지가 탁배기 세 개 사 오래요.”

 “아이고, 네가 서울서 왔다는 대장 할망 손녀구나. 눈도 크고 피부도 흰 게 참 이쁘게도 생겼다. 몇 살?”

 “여덟 살요.”

 “그래? 아줌마 딸도 여덟 살인데. 잠깐 기다려 봐. 무거우니까 아줌마가 들고 가기 좋게 봉지 두 개에 나눠 담아 줄게. 그나저나 영감님 술을 좀 줄이셔야 하는데.”

 봉투를 건네받고 아줌마한테 오천 원을 드리니 이백 원을 거슬러 주셨다. 손바닥에 이백 원을 올려놓은 채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데, 아줌마가 계산기를 가져와 내 눈앞에 대고 검지로 숫자 몇 개를 탁탁 치더니 결괏값을 보여줬다.

 “자, 이것 봐. 1600에 3을 곱하면 4800원. 아줌마 계산이 맞지?”

 학교에서 아직 곱셈을 배우지는 않아서 계산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줌마의 당당한 기세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이백 원으로는 곰돌이 젤리도 못 사고, 새콤달콤도 못 산다. 그나마 살 수 있는 건 200원짜리 츄파춥스 사탕뿐인데, 작년에 그걸 먹다가 앞니가 깨져서 일주일 동안 치과에 다녔다. 그 후로 엄마가 츄파춥스는 절대 못 먹게 하니까 이것도 못 산다. 슈퍼에서 얼른 나와 아줌마한테 들키지 않게 옷소매로 눈물을 찍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내 손에 들린 검은 봉투를 보더니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봉투를 낚아채듯 받아들고서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 몫으로 무얼 샀고, 잔돈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묻지도 않고 말이다.     


(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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