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크레파스를 들고 거실로 나가 달력에 엑스를 하려고 했는데 빨간 숫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이 일요일인 걸 깜빡했다. 자는 할머니 머리맡에서 휴대폰을 슬쩍 가지고 나와 ‘3번 최선희’를 찾았다. 우리 엄마 위로 언니가 두 명 있어서 엄마 이름 앞에 3번이 붙은 거다. 영상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한참이 지나자, 엄마가 침대에 누운 채 눈을 비비면서 전화를 받았다.
“엄마!”
“어, 예솔아. 일찍 일어났네?”
“응, 내가 1등으로 일어났어. 할망이랑 하르방은 아직도 자.”
“할망? 하르방? 하하. 우리 예솔이 제주 사람 다 됐네. 할머니 오늘도 물질하러 나가신대?”
“응, 나도 할망 따라갈 거야.”
“예솔이가 할머니 좀 말려 봐. 오늘은 좀 쉬시라고 해. 요새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고 약 드신다던데.”
엄마는 팔을 이마에 얹고 찡그리며 말했다.
“3호야, 그런 말 마라. 60일 채우려면 물때 맞을 때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삭신이 쑤시다가도 물에 들어가면 다 잊혀진다게. 나 강해숙이는 이름 자에 물이 많이 들어서 바당서 살아야 하는 팔자라.”
영상 통화 중에 엄마가 하는 말이 다 들렸는지 방에서 할머니가 끼어들며 말했다. 할머니는 열 손가락으로 엉킨 머리칼을 슥슥 빗어 넘기며 방에서 나와 화면 속 최선희를 향해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흔들었다. 그 순간, 강해숙과 최선희, 나 김예솔, 세 여자는 동시에 으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 쫌 있으면 서울에서 오는 거지? 8월 23일에 개학하는 거 안 까먹었지?”
“당연하지, 다음 주 금요일에 비행기 타고 예솔이 데리러 날아갈게. 5일만 꾹 참고 기다려. 예솔이 만나면 방학 동안 못 해 준 뽀뽀 한꺼번에 다 해줄게.”
엄마가 입술을 쭉 내밀고 쪽쪽 소리를 냈다. 곧 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제주에서 남은 5일은 생생슈퍼 아줌마 딸, 지수와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했다. 검게 그은 얼굴 위에 박힌 주근깨부터 또랑또랑한 목소리까지, 나는 지수의 모든 게 좋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을 때마다 지수의 은색 어금니가 우리 할머니 물안경처럼 반짝 빛났다. 나는 얼마 안 있으면 서울로 돌아가는데 지수와 조금 더 일찍 친해지지 못한 게 아쉬워서 날마다 지수를 만나러 슈퍼에 갔다. 지수와 쌍쌍바를 쪼개서 나눠 먹기도 하고, 슈퍼에 딸린 작은 방에서 만화 영화를 보며 자다 깨다 하기도 했다.
금요일 점심에는 아줌마가 짜파게티를 끓여 주었다. 지수와 나는 제 꼴은 모르고 까맣게 물든 서로의 입술을 쳐다보고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오늘 밤에 서울에서 우리 엄마 온다. 할머니 집에서 두 밤 더 자고 엄마랑 서울 가.”
“정말? 벌써? 너랑 놀아서 진짜 행복했는데……. 아니다, 다음에 또 만나면 되지. 겨울 방학 때 또 올 거지?”
지수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엄마가 보고 싶어 밤마다 잠자리에 누워 찔끔찔끔 눈물을 흘렸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나는 지수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까지 찍었다.
(5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