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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un 03. 2024

봄날은 간다

-숙명-

근래 비가 잦더니 모처럼 날이 화창했다.  

엄마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아이고, 우리 아들 왔냐?"  

어두운 문을 열고 나오는 엄마의 쭈글쭈글한 얼굴에 한 줌 햇살이 골고루 내려앉아 환하게 반짝였다.  

엄마를 차에 태우고 얼굴을 찬찬히 살피면서 한주의 안부를 는다.  

"엄마, 날씨가 좋네요."라고 운을 떼니, 엄마는 "뭘라 왔냐?"라며 동문서답을 한다.  

세월이 참 빠르다.  

어느새 이팝나무는 하얀 밥풀이 다 떨어지고 산야는 고운 연두색 빛깔을 벗고 짙푸른 초록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렇게 화려하게 자태를 뽐내며 다퉈 피어나던 꽃들이 아침이슬처럼 이내 스러지고 말다니 일장춘몽이라고 한다면 오버한 것일까... 

봄은 얄굿으면서도 도도한 새침데기처럼,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해, 메롱~~'하고 놀리듯 치맛자락을 흔들며 냉큼 사라져 간다.  

그때 음악을 틀었는데 '봄날은 간다'였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엄마의 봄날은 언제였어요?"  

"조금 전에"  

"엥, 아니지, 한참 지나겠지?"  

"그런가."

 엄마는 별 대수롭지 않은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엄마의 봄날은 처녀 때 아니였어요? 연분홍 치마를 곱게 차려입고 사푼사푼 동네를  돌아다니던, 총각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던 그 시절."

"몰라"  

"가장 이쁘고 젊었을 때 말이야."  

엄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제 그런 봄날이 간다 이 말입니다."

"금메."  

"인생이 참, 그 꽃같던 시절은 다 어디로 가고 이렇게 파삭 늙어버렸을꼬, 엄마는 어떤 생각이 들어요?"  

"생각은 무슨..." 

엄마는 아무 생각이 없는 걸까 아니면 귀찮아서일까 별말씀을 덧붙이지 않았다.  

나는 겸연쩍어 노래 2절을 따라 흥얼거렸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길에...>  



나는 괜시리 노래 설명을 해보고 싶었다.  

"옛날에 열아홉 처녀가 있었어요. 그때 마음을 나눴던 동네 총각이 있었거든. 그래서 둘은 서로 같이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근데 총각이 떠나버렸어. 그때 그 처녀의 마음은 어떻겠어?" 

"안좋지."  

"그런 노래예요, 서로 변치 말자, 헤어지지 말자고 굳게 맹세했던 그런 봄날이 가버린다 이 말이여,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변하잖아요,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고." 

"금메."  

"엄마도 처녀 때 막 설레고 좋아하는 동네 총각이 있었어요?"  

나는 은근히 또 미끼를 던져보았다.  

엄마는 또 "몰라"라고 성의(?) 없이 말할 뿐이었다.  

엄마가 내 얘기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아 조금 서운했다.  

내가 엄마에게 괜히 쓸데없는 말을 했나 싶어 머쓱한 순간 '아차'하며 퍼뜩 스치는 게 있었다.  



엄마의 열아홉은 이렇게 시작됐다.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당신 아버지가 어느날 옆 동네 이장하고 자리를 했단다.  

옆 동네 이장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이장은 애주가인 외할아버지를 술청으로 데리고 가 술을 사주고 설레발을 치며 환심을 산다고 한다.  

술기운이 불콰할 무렵 그 이장은 속내를 드러냈다.  

셋째 딸이 이쁘고 참하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그 딸을 자기네 집안 조카한테 주면 어떻겠냐고 살살 꼬셨고, 

이미 기분이 좋아진 외할아버지는 취중에 그러겠노라고  약조를 해버렸다고 한다.  

막걸리 몇 잔에 딸을 팔아넘긴(?) 외할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별수 없이 그 이장  조카랑 결혼을 해야만 했단다.  

그래서 엄마는 데이트는 커녕 얼굴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남자와 인륜지대사를 치르게 됐다.  

"아버지한테 싫다고 하지 그랬어요?"  

"그때는 뭐 싫다좋다 말을 못혀, 혼처가 정해졌으니 그리 시집을 가라 해서 간거야."  


엄마는 아버지를 혼인식 날 처음 봤다고 한다.  

원삼 입고 족두리 쓰며 혼례를 치를 때 궁금하여 고개를 들어보니, 작달막하고 까무잡잡한 아버지 얼굴이 보여 뜨악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 인상이 어떻던가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었어, 그냥 야물지게 보이데."  

"그래서 혼례 마치고 그 집에서 첫날밤 치른 거예요?" 

"그렇지."  

"그때는 신혼여행도 안 갔어요?"  

"자고 일어나니까 시어머니가 문 앞에 떡 서서 일을 시키데."  



가진 것이라곤 달랑 붕알 두쪽밖에 없었다는 종손에게 시집을 간 엄마는 그 이틀날부터, 일찍부터 지아비를 여의고 2남1녀를 홀로 키워온 시어머니, 시어머니보다 더  시집살이를 시킨 시누이, 말썽쟁이 시동생까지 건사하며 집안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단다. 

달콤한 신혼생활은 꿈도 꾸지 못하고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곱지 않은 시선과 훼방 때문에 단둘이 오붓하게 있을 시간도 없었단다. 

어린 새색시는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이 풀꾹새 우는 저녁이면 옷고름에 눈물만 찍어냈으리.

열아홉 처녀의 삶이 그렇게 각박한 삶의 한가운데로 던져져 모진 세파를 겪고  애기 낳아 키우며 살다 보니 순식간에 나이를 먹고 허리가 굽으며 이빨도 빠지더란다.  

이제는 저승길이 멀지 않았다고 엄마는 남의 이야기하듯 말했다.  

"엄마는 그러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겠네?"  

엄마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엄마는 봄날이 없었구나..."  


노래처럼, 동네 총각하고 꽃이 피면 어쩌고 하는 그런 사치스런 감정이랑 애시당초 갖을 수  없었고, 

꽃편지, 알뜰한 맹세 그런 사연도 없이 엄마는 운명이 부여한 책무와 고생을 숙명처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저 기약 없이 언젠가는 그 숙명이 점차 열어지기를 바라면서.. 

엄마가 새삼 가여워서 어깨를 한번 잡아주었다.  

내 마음속 한견에 자오록이 슬픔 같은 게 연기처럼 피워 올랐다.  

봄날을 평생 모르고 살아왔으면서 봄날처럼 따뜻하고 눈물겨운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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