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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향 Galadriel Aug 09. 2024

지금 읽지 않는 자, 유죄

그래도 잘 가세요

네시예요. 아리엘이 노래하네요. "시간을 병 속에 넣어둘 수 있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매일의 시간을 담아두는 거야, 영원이 의미 없어질 때까지 매일의 시간을 담아두는 거야, 그 시간을 너와 함께 해야지..... 오늘은 짐 크로치의 노래 "Time in a bottle"이네요. 손을 씻으며 한 소절, 따라 불러요. "시간을 병 속에 넣을 수 있다면....". 도마를 꺼내며 한 소절 더 불러요. " 너와 함께 해야지..." 하루가 다 간다고 말할 수 없는 오후 네시. 노래를 부르며 밥을 지어요. 툭툭 턱턱.  평소에 경쾌하던 도마소리가 물에 젖은 듯, 축축하고 무겁네요. 푸른색 긴병을 들고 서 있는 사람. 잘 가라 했지만 아직도 이별 중인 그분 탓인가 봐요.  "나 없어도 되지?"라 묻는 말에 "응 없어도 돼"라고 쿨하게 대답하는 그분 말이에요.


"없어도 돼"를 곱씹으며, 감자, 호박, 양파를 깍둑 썰어요.  쪽파와 청, 홍고추는 송송 썰고요. 자그마한 뚝배기에 하얀 쌀뜨물과 노랗게 익은 된장 한수가락을 풀어 가스불에 올려요. 깨끗이 닦은 다시마 한 조각과 멸치 몇 마리를 먼저 넣고 끓여요. 끓기 시작하면 다시마와 멸치는 건져내고, 썰어둔 야채와 다진 마늘 한쪽을 넣어요. 구수한 냄새와 함께 끓어오르는 거품을 걷어내고 쪽파와 청홍고추를 넣어요. 때맞추어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는 기계음이 옆구리를 쿠쿠찌르네요. 냄새도 소리도 참 기뻐요. 고백하면요. 찌개를 끓이고 밥을 짓는 기쁨을 모르고 살았어요.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고, 돌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 일인지는 잃어본 자만이 아는 특권이죠. 누군가에게는 단 한 번만 더, 남편을 위해 짓고 싶은 저녁밥이란 걸 알고도 모르는 아내들에게 "있을 때 잘해"라는 말 대신 조용히 노를 젓고 계신 분. 없어도 되냐는 물음에 없어도 된다, 잘라 말하는 그녀. 나는 쿨한 그녀의 창고를 털어 봐야 했어요. 


사람들에겐 잊을 수 없는 숫자가 있어요. 자신의 생일, 누군가의 생일, 누군가와 처음 만난 날, 입학식, 졸업식, 결혼식과 장례식날짜까지. 그녀의 창고 속에도 색인처럼 정리한 숫자들이 오밀조밀 찍혀있었어요."770918"도 그중 하나예요. 47년 전. 1977년 9월 18일. "처음 하는 결혼이라 어색했다"는 잘 생긴 남편과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된 날이더군요. 첫사랑이던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내가 되고, 살고 사랑한 기억들을 무심한 듯 서술해 놓았어요. '그러셨구나' 하며 웃고, '그럴 수 있겠네요'하며 미소 짓고. '맞아요 맞아'하며 맞장구쳤어요. 어서 털고 자야 하는데, 박제된 숫자들을 덮을 수가 없었어요.  오래도록 멈춰 서 있었어요. 서서, 그녀 눈동자 속에 묻은  꽃잎을 바라다보았어요. "결혼기념일"로부터 마흔여섯 해가 되던 지난해 7월 10일. 첫사랑이었던 남편을 "사별"이라는 단어로 묻고. 지난 4월엔, 떠나버린 남편을 회고하며 떨어지는 꽃잎에 한번 더 남편을 묻고. "분분한 낙화, 이제는 가야 할 때라고 하는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으로 묻어요. 사진 속 남편모습은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피어 웃는데 말이에요.  


병 속에 가둬둔 시간을 꺼내 쓸 수 있다면 나는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신혼시절로 가고프다는 그녀. 로망이었던 남편과 백여 통의 연애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결혼을 했어요. 결혼은 행복의 시작이 아니란 걸 살아본 자들은 알아요. 결혼과 동시에 주어진 관계와 생활의 무게는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요. 그녀 역시 같은 짐을 지고 갈등했어요. "너그러운 소통보다는 싸늘한 삐짐과 고집스러운 침묵... 뜨겁게 화해해도 또다시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후회해요. 다시 그 시간이 주어진다면 "연약함을 까발리고 폭로하기보다  덮어주고 품어줄 것"이라 해요. 우리가 알고도하지 못하는 '먼저' 미안하다고 '먼저' 고맙다고 말할 거라고 해요. "먼저 사과하는 이는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를 소중히 여겨 아끼기 때문"이라면서요.


"당신 덕분에 많이 누렸어"라는 말을 남기고 간 남편, 만질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남편을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으로 더듬어요. 신혼첫날밤을 보낸 함안의 집을 둘러보며 "다시 올 결심"을 하고"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는 모든 곳에 있었고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며 받아들이기 힘든 남편의 부재와 대면해요. "모든 곳에 있었다"는 문장에서는 여태 참았던 감정을 왈칵 쏟고 말아요. 다음 창고를 열었어요. "잘 가세요"했지만 아직 보내지 못한 아내는 오늘도 싸워요.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안고, 쓰다듬지만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외롭고 아픈 이별을 홀로 겪어요. 50년이란 세월! 거짓말처럼 떠나버린 남편과의 시간은 꿈이었던가 싶어요.  켜켜이 쌓인 슬픔을 누군가 찾아와 안아주고 등 두드려 위로해 주어도 어차피 긴긴밤을 홀로 지낼 결심을 해요. 사랑하는 이를 잃어본 자들에게는 다 보이는 그 결심 말이에요. 결심과 위로가 있어도 끝없이 밀려드는 그리움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요. 그럴 땐 남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어요. 50년 전, 처음 만났던 부산역 앞 행운다방을 찾아가요. "여기일까? 저기일까?"  "함께였다면 찾을 수 있을 텐데" 하며 이 땅에는 없는 남편과 함께 걸어요. "휘황 찬란히 빛나는 불빛을 바라보며, 흐르는 세월은 무상하고 애틋하다"며 눈물을 뿌리며 둘이 홀로 걸어요. 


'그리움' 문패처럼 걸어둔 집. 그녀의 집엔 아프지만 아름다운 강이 흘러요. 강줄기 옆으로 피고 지는 꽃이며 과실수처럼, 꽃 피고 열매 맺고 입지는 겨울나무까지, 한눈에 보이는 섬진강이 흘러요. 잔잔해 보이지만 여기저기 유속도 빠르고 수심이 깊은 곳도 있어요. 재첩과 다슬기가 살고, 강변에 노란 유채꽃, 황홀한 멀미를 일으키는 강이에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모두 경험한 나이 많은 사공이 사는 섬진강이요. 지금 이별 중인 사람, 곧 닥칠 이별이 두려운 사람, 이별했지만 보내지 못한 사람... 건너야 하지만 배가 없는 이들의 배를 준비하고 '기꺼이 뱃사공이 되겠다' 결심을 보여주는 고마운 사람. 작가는 그렇게 사공이 되어 섬진강 강변에 살아요. 나도 한때,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방한칸 얻어 살고 싶었어요. 봄이면 강물을 먹고 자란 쑥과 냉이로 점심상을 차리고. 저녁이면 다슬기 주워 끓인 된장국을 먹고, 밤이면 강 위로 쏟아지는 하늘의 별을 헤고 싶었어요. 쌀 씻어 밥 하는 일이 그리도 싫던 내게 밥 하는 기쁨을 가르쳐주신 작가님. 그래서 오늘은 작가님을 위해 밥을 하려고 해요. "저의 슬픔으로부터 저와 제가 남은 사람들을 위한 새 삶을 주십시오"기도하시는 작가님의 새 삶을 위해 나는, 기도대신 밥을 지어 보내려고요. 


좋은 사람과 소풍 갈 때 필요한 바구니는 깨끗이 털어두었어요. 다들 '피크닉바구니'라 부르는 소쿠리말이에요.  20년을 넘게 살아온 캐나다땅에서도 나는 늘 소풍 바구니라 불러요. 네모난 4단 도시락통은 깨끗이 닦고요. 붉은팥 드문드문 섞어 지은 흰쌀밥은 맨 밑칸에 담고. 애호박과 부추, 청양고추 썰어 넣고 부친 부침개와 두부조림은 그 위칸에 담아요. 꽈리고추와 메추리알을 넣은 소고기장조림과 무넣고 조린 은대구는 그 위칸에 담구요. 맨 위칸에는 좋아하시는 쑥떡과 잘 익은 방울토마토, 블루베리, 복숭아, 망고를 담았어요. 다슬기를 넣고 끓인 된장국은 보온병에 담아 자줏빛보자기로 한번 더 쌌어요. 따끈한 된장국이 있어도 소풍엔 와인이 필요해요. 해서, "칠레 카베르네 소비뇽의 꽃"이라 하기에 고민 없이 선택한 "산타 에마, 그란 레세르바 카베르네 소비뇽(Santa Ema Gran Reserva, Cabernet Sauvignon)도 준비했어요. 와인잔도 두 개 넣고요. 


도시락도 와인도 준비되었지만 오늘도, 꽃은 없습니다. 다행히 꽃 같던 남편과, 아직도 꽃 같은 작가님이시니, 꽃은 없어도 되겠어요. "왜 내려왔어?"라는 물음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멸된 버릴 것 같았어"라 답하시던 그날의 대화, 누군들 잊을 수 있겠는지요. 결코 소멸될 수 없는 두 분의 사랑은 "Time in a bottle"속에서 영원히 반짝일 텐데요. 작가님! 그리운 서무아 작가님! 생에 가장 길고 외로웠을 1년, 살아내고 견뎌내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눈물은 닦으시고 기도대신 지은 도시락으로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 조금이나마 달래 보세요. "꿈길밖에 길이 없으니" 국이 식지 않을 오늘밤이면 좋겠어요. 꿈에라도 만나 행복한 시간 보내시면, 그러실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지난밤 털어온 '강 건너기 안내서" 읽어보세요.

https://brunch.co.kr/@77a84b849d07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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