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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향 Galadriel Oct 10. 2021

게임은 지금부터다

지구를 한바퀴 돌아야 만나는 나라, 아내

게임은 지금부터다. 4대 4 동점이던 9회 말 2 아웃 상황에서 추신수가 타석에 올랐다. 메이저리그 최강의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인 크레이그 킴브럴은 97마일에 이르는 직구를 쏘았다. 추신수의 야구 방망이는 힘차게 원을 그리며 총알처럼 빠른 공을 받아냈고 “딱”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공은 이미 홈런 볼이란 걸 모두가 알았다. 그는 한국시간 2013년 5월 8일 중견수를 넘기는 시원한 끝내기 홈런 한방으로 소속팀에게 5대 4 역전승을 안기며 영웅이 되었다. 야구는 9회 말 2 아웃부터 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9회 말 2 아웃에서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초대형 홈런포를 쏘아 올리신 할아버지 빅터의 생일날 아들이 찾아왔다. 컴퓨터는 물론 스마트 폰 조작이나 TV를 켜는 일 조차 어려운 아버지를 위해 신세대 아들이 노트북을 들고 왔다. 90세 생신이라 성대한 파티를 계획했지만 코로나가 태클을 걸자 줌을 연결해 인터넷 생일 파티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파티를 끝내고 나오시는 할아버지와 아들을 복도에서 마주쳤다. “얘가 바로 홈런이야” 하시며 아들 에반을 소개하셨다. 귀하지 않은 자식이 있을까 만은 홈런 보이 에반은 그야말로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아들이다. 에반은 형제자매 없이 외동아들로 자란 할아버지의 첫아들이자 유일한 자식이었다. 

 

빅터는 결혼을 하면 많은 자식을 가지고 싶었다. 아내가 동의해 준다면 아들 딸 9남매를 낳아 야구팀을 만들고 싶었다. 스물두 살 어린 나이에 사랑하던 여자와 결혼을 했고 감독이 될 준비를 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큰 집과 좋은 직장이 있었고 건강한 부부였으니 아이만 태어나면 될 터였다. 아무런 문제가 없던 부부였지만 기다리던 아이는 10년이 넘도록 생기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입양을 생각했지만 아내의 반대로 입양을 하지 못했고 자식 문제로 깊어진 부부 사이 갈등의 골은 끝내 이혼이라는 선택을 하게 했다. 

 

이혼을 하고 아내가 먼저 재혼을 했다. 재혼한 아내는 3년 사이 두 명의 아이를 낳아 행복한 삶을 이어 나갔다. 할아버지도 서로가 마음이 있었지만 말하지 못했던 고등학교 친구와 재혼을 하셨다. 마흔에 한 결혼이었다. 자식을 간절히 원하던 할아버지와는 달리 아내는 전남편과의 사이에 두 명의 딸이 있었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아이생각은 접고 둘이 행복하게 살자며 결혼할 때 했던 약속을 없던 걸로 하자고 했다. 두 번째 결혼은 4년 만에 끝이 났다. 

 

두 번의 이혼으로 지칠 대로 지친 빅터는 자식도 결혼도 포기하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비즈니스에 열정을 쏟으며 살았다. 55세가 되던 해에 스물여섯 살 아래 비서였던 케이든의 적극적인 구애로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스물아홉, 나이답지 않게 마음도 넓고 사교성 좋은 그녀를 부모님도 친구들도 모두 좋아했다. 비즈니스맨의 배우자로 한 남자의 아내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세 번째 결혼은 앞서 했던 두 번의 결혼생활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자신의 나이를 인식하고 자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니 아내는 그냥 사랑스럽고 고맙기만 했다. 아내와 단둘의 삶도 충분히 행복했고 비즈니스 파트너를 영입해서 일과 가정을 균형 있게 가꾸며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쁨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나이 들고 늙어 아내 품에서 죽는 복을 누린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렇게 살다 갈 수 있다면 많지는 않지만 아내에게 주고 갈 재산이 아깝지 않았다.

 

모든 걸 다 주고 싶던 이해심 많고 평온하던 아내가 마흔을 넘기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는가 하면 급격한 우울증에 빠지고 한밤중에 일어나 샤워를 하곤 했다. 갱년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여자의 갱년기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내의 갱년기는 낯설고 당혹스러웠다. 식탐이 없던 아내가 차 안이고 침대 옆이고 할 것 없이 집안 구석구석 먹거리를 사다 쌓아 놓았다. 아이스크림 통을 끼고 살았고 짠 오이피클은 병째 들고 앉아 먹곤 했다. 

 

서너 달 사이 급격하게 살이 찐 아내가 한밤중에 일어나 숨쉬기가 곤란하다며 배를 움켜 잡고 복통을 호소했다. 앰뷸런스를 타고 응급실로 갔다. 피를 뽑고 이것저것 바쁘게 검사를 했다. 링거액을 꽂고 잠이든 아내 옆에서 꼬박 밤을 새운 뒤 새벽에서야 검사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임신입니다.”

 

지금도 그때 그 의사의 음성이 신의 목소리처럼 신비하고 생생하게 들린다는 할아버지께서는 69세에 생각지도 않던 홈런 볼을 날리신 거였다. 늦은 나이에 가진 아이라 혹여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렇다 해도 기적처럼 주신 생명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치리라 다짐하며 설렘 속에 출산을 기다렸다. 손가락 개수와 상관없이 생명 자체로 소중하기에….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난 아들은 열 개의 손가락과 열 개의 예쁜 발가락을 고물거리며 빅터를 아버지로 만들어 주었다. 부부는 아들을 신의 선물이란 뜻을 지닌 이름 “에반"이라고 불렀다. 스물여섯 살의 나이를 극복한 결혼이었고 자식 복은 없다고 생각했던 빅터에게 아들까지 안겨준 마흔세 살의 아내는 출산을 하고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내 얼굴에 하나 둘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들이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 외출이 잦아지고 눈치를 보고 거짓말이 늘어났다. 아들을 핑계로 각방을 썼고, 돌아누운 아내의 등은 넘을 수 없는 에베레스트였다. 그렇게 돌아 눕기 시작하면서 아내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갈 수 있는 멀고 먼 나라가 되었다. 

 

많이 사랑했다. 그녀의 품에서 눈감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너무 젊고 아름다운 아내의 행복을 위해 또 한 번의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옆에 두고 미워하는 것보다 놓아주므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은 할아버지가 키울 수도 있었지만 아이는 엄마가 키우는 것이 아이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하루라도 안 보면 병이 날 것 같은 열세 살 아들의 양육권을 아내에게 주고 대신 만나고 싶을 땐 언제든 만날 수 있도록 했다. 붙잡고 싶지만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나의 아픔을 감내하고 기꺼이 내어주는 것, 그것이 할아버지의 사랑법이다. 

 

80세가 되던 해에 54세이던 아내를 보내고 이곳 리타이어먼트 홈으로 들어오셨다. 다음 해에 비슷한 또래의 남자와 재혼한 아내는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약속대로 할아버지가 원할 땐 언제든 에반을 데려오고 데려갔다. 의붓아버지도 에반을 진심으로 사랑해주었고 그늘이나 상처 없이 잘 자란 에반도 지난해 결혼해서 지척에 산다. 가끔 케이든 부부는 집으로 할아버지를 초대해서 식사도 하고 서로의 생일도 챙기며 가족처럼 지낸다. 서양인들이라고 해서 이혼한 부부가 모두 이들처럼 살지 않지만 이들에겐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강물이 흘러 바다로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은 아내 케이든을 만난 것이고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아들 에반과 함께 케이든을 놓아준 것”이라는 할아버지를 만나면 마스크를 쓰고서도 숨쉬기가 얼마나 수월한지 모른다. 50세가 된 친구 아들이 직장을 잃고 집까지 은행에 넘어갔다는 말을 들으시곤 "이제 후반전 시작이야,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지, 누가 알아? 그 녀석이 9회 말 홈런을 날릴지"라 하셨다. 췌장암이라는 73세 폴 할아버지에게 “우린 아직 다 안 살았어, 누가 알아? 기적이 일어날지" 하시고 평생 독신으로 사신 바브라 할머니께는 “그대는 아직 날 설레게 한다오"하시곤 껄껄 웃으신다.

 

추신수가 9회 말 2 아웃에서 역전극을 펼쳤듯 얼마든지 판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이 9회 말이다. 할아버지 빅터는 많은 이들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놓아줌'으로 3점짜리 대형 홈런을 날리며 홈(리타이어먼트 홈)으로 들어오셨다. 내가 이기면 네가 져야 하는 게임이 아닌 세 사람 모두를 승리자로 만든 할아버지만의 전술이었다. 9명의 자식을 낳아 야구팀을 만들고 감독이 되고 싶었다는 할아버지는 에반 하나로 충분한 팀의 명감독이었다. 모두가 승리하고 언제나 승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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