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기린을 위한 파반느

by 늘보

자연선택설: 다양한 변이를 가진 생물이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생존 경쟁하여 적응한 개체가 살아남아 자손에게 유전자를 전달하며, 이것이 오래 누적된 결과 진화가 일어난다.

“슬프지 않니?”


학생들의 의문 가득한 눈동자가 나에게 쏠린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과학 수업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과 논리로 가득했던 공간에 선생님인 내가 갑작스레 '툭' 하고 던져놓은 이질적 감성의 단어 앞에서 헛웃음을 터트리는 학생들도 있다.


이게 다 이 그림 때문이다.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설명할 때마다 만나는 이 그림 앞에서, 나는 항상 울컥하고 치고 올라오는 울음 비슷한 것을 삼켜야 했다. 매번 슬프지 않냐고 물었지만, 매번 동의를 얻지 못했다. 아무 감흥 없이 지나치려고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묘한 감정이 목구멍을 '' 하고 막았다.

그림 속에는 목이 긴 기린과 짧은 기린이 어우러져 풀과 나뭇잎을 뜯고 있다. 초록은 땅에도 나무에도 풍성하다. 그러나 바로 옆 그림에서는 높은 곳의 나뭇잎을 먹으며 생존한 긴 목의 기린과 달리, 짧은 목의 기린들은 쓰러져 죽어있다. 땅 위의 풀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환경에 적응한 목이 긴 기린은 살아남고 적응하지 못한 목이 짧은 기린은 죽어 도태된 것이다. 이런 과정이 오랜 시간 누적되어 기린의 목이 길어졌다는 것이 다윈의 진화론이다. 책은 이렇게 살아남은 기린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 이면에는 지워진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목이 짧은 기린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


나의 시선은 그림 속 쓰러져 있는 기린에 머문다. 죽은 기린은 말이 없지만, 쓰러져 있는 등덜미를 따라 슬픔이 흐르는 것 같다. 자신도 세상에 분명 존재했었다고, 사라져 가며 온몸으로 소리치고 있는 것만 같다.


대여섯 살 무렵, <개미와 베짱이>라는 만화영화를 보고 울음이 터진 나는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가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도 세 시간은 더 울었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 베짱이의 잘못이 과연 목숨과 바꿀 정도인가에 대해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엄마는 혀를 내두르시며 “아이고, 저렇게 감수성이 유별나서 우리 딸 나중에 작가 해야 되겠네” 하셨다.


그때부터 나의 장래 희망은 작가였다. 학교에서 장래 희망을 써내라고 할 때도 나는 망설임 없이 작가라고 적어냈다. 백일장에서 상을 휩쓸지는 못해도 소소한 입상도 하고, 나의 자작 시를 친구들이 돌려 읽기도 했다. 교과서에 실린 이형기 시인의 <낙화> 한 구절에 가슴 설레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초혼>을 부르짖으며 마치 내가 산산이 부서진 것처럼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진학한 나는 ‘이과생’이 되었다.


그 시절 '문과에 가면 아사하고 이과에 가면 과로사한다'는 세상의 현실 앞에 놓인 문학소녀는 가난의 결핍 때문이었는지, ‘과’ 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은 건 줄 알았는지, 이과의 길을 선택했다. 분명한 것은, 그 당시 나에게 ‘작가’라는 꿈은 높은 곳의 나뭇잎을 단 한 장도 따다 줄 수 없는, 생존에 부적합한 '짧은 목'처럼 느껴졌다는 사실이다.


그때 나는 내 손으로,

안에 살고 있던 목 짧은 기린의 목을 쳤다.


글자 대신 숫자들에 둘러싸여 사는 삶도 그럭저럭 굴러갔다. 옛말이 맞았는지 아직 아사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하루하루 닥쳐오는 일들을 쳐내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즈음, 그 기린 그림이 마음속으로 훅 들어왔다. 생존 경쟁에서 밀려 굶어 죽은 짧은 목의 기린.


그날 나는 그 기린을 통해

내 마음의 아사 상태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지금 나의 모습은 생존을 위해 적응한 결과물이다. 일을 잘하고 있지만 그다지 즐겁지 않고, 글을 쓰고 싶지만 주위만 맴도는, 어딘지 목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 그림 앞에 설 때마다 내 안에서 죽어갔던 짧은 목의 기린이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 같다.

“나를 죽인 결과물이 겨우 그거냐?”


베짱이가 노래와 목숨을 맞바꿨을 때 느꼈던 슬픔이 몰려든다. 베짱이는 용감했다. 세상을 핑계로 자신의 노래를 멈추지 않았으니. 그리고 나는 비겁했다.


그래서 이제 진화에 역행하기로 한다. 굶어 죽더라도 한 번쯤은 목 짧은 기린으로 살아보고 싶다. 어정쩡한 길이의 목은 꼭대기의 나뭇잎을 먹기도, 낮은 곳의 물을 먹기에도 애매하다. 짧은 목의 기린은 긴 목의 기린보다 낮은 곳의 물을 먹기 훨씬 편했을 것이다. 내 영혼의 오아시스는 나무 꼭대기가 아닌 땅 위에 넓게 펼쳐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따라 미끄러지는 연주자의 손길 같다. 나는 오래전 내 맘속에서 죽어갔던 ‘죽은 기린을 위한 파반느’를 연주한다. 그 선율을 따라, 목 짧은 기린들이 푸른 초원을 다시 힘껏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