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先生)하자

한자로 풀면 선생이란, 그저 먼저 산 사람의 뜻이 아닐까?

by 인해 한광일

사람들은 곧잘 선생을 한자 先生으로 표현하곤 한다. 사전을 찾아볼 것도 없이 한자 그대도 풀면 선생이란 '먼저 산 사람' 쯤일 것이다. 그렇다면 先生의 '先'자는 문제가 없겠으나 '生'이 문제겠다. 그렇지만 문제될 것도 없다. 生이란 산다는 것인데,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먹고 놀고 일하고 겪어보고 해보고 쉬고 어울리고 주고 받고 누리고... 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선생을 다시 '먼저 먹어 본 사람, 먼저 겪어 본 사람, 먼저 해 본 사람' 쯤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설마 '앞에서 이끄는 사람'으로 해석한다면 그거야 말로 크나 큰 오류일 것이다. 더욱이 21세기를 사는 선생이 혹시라도 후자처럼 해석한다면 그는 아마도 21세기에서 월급을 받는 20세기 식 선생일 것이다.


가끔 '先生'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읽으면 어떨까 생각하곤 한다. '선생(先生)하다 - 아이들보다 앞서 생각해보고, 아이들에게 내놓기 전에 들쳐보고, 해보고, 만져보고 뭐 그렇게 아이들에게 내놓을 것에 대해 먼저 해보다. 뭐 이쯤이면 되겠다. 아이들보다 먼저 살아보면, 곧 아이들이 겪을 문제, 어려움, 궁금증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되겠기 때문이다.


'선생하는 것'은 어쩌면 아이들과 언덕길이나 계단을 오르는 일일 것도 같다. 즉 교사가 '선생한다'는 것은, 아이들과 함께 섞여 있으면서(물론 때로는 앞에서서, 때로는 뒤를 따라가며) '어제 아이들에 앞서 올라 본 그' 언덕을 올라가는 일 일 것이다. 아이들이 직접 두 발로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저어서 언덕 꼭대기에 이르게 하는 것. 그것이 교사가 선생(先生)하는 모습 아닐까?


30년 넘게 선생을 했지만, 내 30년 중 몇년이나 선생다운 선생을 했을까? 실은 나도 적지않은 선생 노릇의 세월을 '앞에서 무작정 이끄는 사람' 노릇을 한 것 같다. 경상도 방언으론 선생질을 한 것 같다. 시간이 꽤 지나고나서야, 남들이 말하는 구력(球歷)이 쌓이다보니, 내 선생질에 자꾸만 고개가 갸웃거려졌고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무릎을 탁치는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쯤 지역 신문사의 기자가 내 국어 수업을 보고 싶다는 청을 받아들였으며, 바로 그 국어 수업이 끝난 뒤(그때 나는 아이들과 시공부를 했었다) 그가 내게 '당신의 교육은 어떤 것'이냐는 물음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때의 내 대답은, 내 가르침은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가르치는 것'이라는 소릴 했었다. 한참 생각한 후에야 기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교실을 나섰다.


그때 나는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 있었던 때였고, 시를 많이 읽고 쓰던 시기였다.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칠 때가 되면, 한 열흘 간은 칠판에 시를 옮겨 써주고, 좋은 시를 들려주었으나,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기보다는 시를 읽은 아이들의 감상을 다른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그 아이의 감상이 다른 아이의 이야기로 연결되도록 고리를 짓기만 하곤 했었다. 한 시간 내내 아이들이 시를 두고, 이야기를 이어 갔고, 시 그림을 그리거나, 시에 담긴 것으로 놀거나, 시로 다른 시를 만드는 등 시 수업을 이어 나갔었다. 나는 그것으로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지 않으면서 시를 가르치는, 선생다운 선생 노릇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곤 했었다.


연배있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또 깨달음 같은 것을 건져 올렸다. 수학과 여러가지 모양의 삼각형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토론이었다. 어쩌면 4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의 선생님들이건만 그들은 하나도 구태의연한 선생님들이 아니었다. '가르치기보다 가지고 놀게하'는 가운데 익숙하게 하자는 생각은 신선했다. 그 토론이야말로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전에 서로의 수업 비결을 나누는 '선생(先生)' 중이었던 것이다. 선생들이 모여 함께 수학 수업을 선생(先生)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동료 선생님들은 수업 전에 선생하는 것의 유익성과 효용성과 필요성을 공감했다.


다음 날 수학 수업시간엔 아마도 여러 교실에서 아이들보다 먼저 산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조금만 가르치고,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가르치는 묘수를 펼쳐냈을 것이다. 아이들은 먼저 산 선생님들의 기획에 의해, 놀이가 된 수업에서 큰 긴장 없이 의미나, 규칙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수업 기획을 펼치면서 선생님은 꼭 필요한 만큼만 질문하여 이끌어 주는, '학생들 간의 고리' 역할, '무대 감독' 역할로 스스로를 한정하였을 것이다. 반면 학생들에겐 충분한 활동시간이 보장되었을 것이므로, 그날 수업은 그리 재미없지 않은 수학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나이가 많다고 모든 방면의 선생(先生)은 아닐 것이다. 요즘 같이 다채로운 사회에선 오히려 어른들은 꿈도 못 꿀 놀이와 체험 속에서 아이들은 신이 난다. 그렇다면 그 분야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선생(先生)이다. 그러니 가르침과 배움에는 노소가 따로 없다는 선인들이 말은 진리이다. 다시 동사 '선생'을 생각한다. 자식을 가르치던 학생을 가르치던, 제대로 가르치려면 제대로 알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려면 가르치기 전에 꼭 먼저 선생(先生)해 보심이 어떠할지.






겨울 목련



바람 휘감는

겨울 모퉁이에 서서

목련 가지 보송보송

솜털 눈 떴다

가지가지 손끝마다

솜털 눈떴다, 천개의 눈


겨울 목련 눈

겨울을 살아가는 것들의

모든 이야기를

가만 보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겨울산의 명상

겨울 들판에 서서

겨울내내 기도 놓지 않는

시리고 야윈 손가락들

눈 위로 걸어간

발자국들

눈 위에 내려 앉은

새 발자국들


온 겨울 뜬 눈으로

다 보고 있는

천수천안 목련 가지

천수천안 목련꽃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