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월광태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해 한광일 Feb 28. 2024

가야 태자 월광기(記)

제20화(최종화).   탈속

  월광은 가야산 거덕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거덕사는 큰 절이 아니었으나 기거하는 승려들이 적지 않았고, 전쟁으로 다친 병사들과 백성들을 거두고 있었다. 그 때문에 거덕사(擧德寺)에서는 늘 일손이 달렸다. 월광은 거덕사에서 그들을 돌볼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었다.

  비탈밭에는 돌멩이가 많아서 호미 날이 쉽게 흙을 파고들지 못했다. 그런데도 잡초들은 용케 뿌리를 내리고 잘도 자랐다. 풀을 뽑지 않으면 콩 싹이 모두 녹아 없어질 판이었다. 월광은 오월의 햇살 아래 비 오듯 땀을 흘렸다. 이마에서 흐른 땀이 눈으로 들어가 눈이 쓰라렸다. 그러나 월광은 그 정도의 고행으로는 아무것도 속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매를 들어 이마의 비지땀을 닦는데 누군가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미루이옵니다."

  월광은 미루가 어찌나 반가운지 밭 가운데서 벌떡 일어섰다.

  “처사께서는 또 어쩐 일이시오.”

  월광은 몇 달 만에 찾아온 미루가 반가워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허허, 나를 그리 부르지 마시오. 나는 이미 불가 사람이오.”

  그러면서도 월광은 미루가 이끄는 대로 나무 그늘로 걸음을 옮겼다. 월광이 거덕사(擧德寺)에 온 지 이미 이십여 년이 되었지만 월광은 사실 속세를 말끔히 지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탈속해서도 미루에게서 아라가야에서 놓친 고모 아령 공주의 소식만은 꼭 듣고 싶었다. 미루는 대가야의 관리로 지내면서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소식쯤은 얻어듣고 사는 형편이었다. 이번에도 미루는 월광에게 아령 공주의 소식을 풀어놓았다. 

  “이번 소식은 백제 조정에서 흘러나온 소식입니다.”

  “아령 고모님의 소식이오?”

  “아마도 그럴 것이옵니다.” 

  “어서 말씀해보시오.”

  “왜의 땅에 전에 없던 여제(女帝)의 나라가 새로 섰다는 소식입니다. 새 나라의 이름은 아라가라구니라 했

  고, 여제는 아라가라 구렌이라 하옵니다. 또한 그 여제는 가야 땅에서 건너 간 도래(渡來)인이라 하옵니다.” 

  월광은 비로소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미루도 말없이 월광 앞에 마주 앉은 채 눈감은 월광의 얼굴이 미묘하게 움찔거리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며 기다렸다. 한참 만에 월광이 눈을 떴다. 그리고 그윽하게 미루를 바라보았다. 그런 월광을 마주 보며 미루가 다른 소식이 더 있다며 입을 열었다.

  “김무력의 어린 손자가 김유신이라는데 서라벌의 화랑이 되었다 하옵니다.”

  월광이 다시 눈을 감았다. 언젠가부터 월광은 미루가 전하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눈을 감는 버릇이 생겼다. 눈을 감은 귓전으로 미루의 보고가 계속 이어졌다.

  “유신은 이번 낭비성 싸움에 처음 출전했는데 고구려에 다 패한 전투를 그가 승리로 이끌었다 하옵니다.”

  월광이 가만히 다시 눈을 떴다. 미루가 말을 멈추었다.

  “고모님 소식이면 되었소. 다른 소식은 그만 두시오.”

  미루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월광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미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연화 공주님의 소식이 있습니다.”

  연화 공주라는 말에 월광이 일어서던 몸을 내려놓았다.

  “공주님의 서찰이 발견되었으나 서찰의 주인을 찾지 못해 전해지지 못하다가 이년 전 서라벌의 진평왕에게 

  전해졌다 하옵니다.”

  “아직 살아계신다 하오이까?”

  월광은 자신도 모르게 미루를 다급히 다그쳤다.

  “입적하신 지 오 년이나 되었다 하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공주님께선 그 옛날 보도부인께서 기도를 올리시던, 바로 그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 고 속세와 인연을 끊었

  다 하옵니다. 이후로 묵언수행을 정진하며 말씀을 잊은 채 지내시다가 오년 전 오래 전의 병이 도저 입적하

  셨다 하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공주님께선 입적하시기 전에 서찰 한 장을 남겨 주인에게 전해 달라 유언했으나 이제껏 그 주인을 찾지 못

  하고 있었다 하옵니다.”

  월광은 차마 듣고만 있을 수 없어 신음처럼 관세음보살을 연호했다.

  “서찰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대가야 백성들에게만 험하던 세율이 거두어지고, 형벌에 있

  어 대가야 땅의 백성들은 신라계이거나 가야계이거나 구분을 두지 않은 것이 진평왕에게 서찰이 전해진 

  때부터라는 소문이 있사옵니다. 또한 농번기에 대가야 백성들을 동원하는 일이 없어지고, 대가야 사람 중

  에도 벼슬길에 나아간 자도 있다고 합니다.”

  “…….”

  “폐하, 서찰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이 되십니까?”

  “나무관세음보살….”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 몇몇은 바로 그 주인이 폐하시라고들 하옵니다.”

  “쓸데없는 소리….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월광이 관세음보살을 연호했지만 미루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공주님이 입적하신 뒤, 그 절의 주지가 공주님의 애틋한 마음을 기려 현판을 연화사라 바꾸었다 하

  옵니다.” 

  월광이 곤혹스러운 마음을 간신히 다잡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보시게, 미루 보살님. 평생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소. 이제부터는 내게 오지 않아도 되오.”

  그 말을 들은 미루는 한참 동안 월광의 감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나서 월광에게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엎드린 채 미루는 한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어느새 눈을 뜬 월광이 가만히 두 손으로 미루의 어깨를 붙들어 몸을 일으켰다. 미루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월광의 눈자위도 눈물이 흥건했다. 미루의 젖은 눈에도 월광의 눈에도 잔주름이 적지 않았다. 월광이 먼저 미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루도 월광에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월광이 먼저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미루도 따라 일어섰다. 월광이 미루를 바라보며 자애롭게 웃은 뒤 먼저 미루에게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월광의 발길이 거덕사로 들지 않고 거덕사를 비껴 멀리 사라져갔다. 미루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월광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월광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야산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새로 불사(佛寺)를 일으킬 만한 곳을 찾는 중이었다. 이제야 가야누리의 억울한 영혼들을 위해 마음 놓고 기도할 수 있는 도량을 지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달지라…, 월광이라…. 온 누리를 비추는 달빛이라…. 그렇지, 가야누리가 온통 상처뿐인데 어루만져 줄 손이 없구나…. 옳지, 월광은 그런 뜻이렷다. 내 참으로 월광이 되어야겠구나. 온 가야누리의 상처받은 백성들을 어루만져주는 달빛이 되어야겠구나.’


  혼자서 중얼거리는 스님의 발걸음이 점점 더 깊은 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가야 태자 월광기(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