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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Apr 29. 2024

아주 오만한 글, 명품학부모 안내서

11.  자식교육을 망치는 비법 1

  예전에도 선생 똥, 개도 안 먹었다지만

  그래도 예전엔 대부분 선생님과 학부모는 한 편이었던 것 같다. 아니 무조건 학부모가 선생님 편이었을 것이라는 말이 더 설득력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맞을 일도 아니건만 손바닥을 맞았고, 내 잘못도 아닌데 단체 기합이라는 것을 받고도 찍소리도 못했으니 말이다. 시험 잘못 본 것을 순전히 학생만의 책임으로 돌려 틀린 문항의 개수만큼 회초리가 바람을 가르곤 했었으니 말이다. 학생 인권이란 아직 발굴조차 되지 않은 낱말이었다.


  학교가 무너지고 있다는 소릴 들은 지 거의 십 년은 족히 되었지 싶다. 무너진다 무너진다 하더니 정말 적지 않은 학교가 무너져 내리고야 말았다. 무너진 잔해더미에서 사상자가 발견되었고, 사상자는 선생님들이었다. 학교를 무너뜨린 요소는 학교 안팎에서 발견되었는데, 가장 큰 세력은 어처구니없게도 학교 담장 밖의 학부모들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물론 내부적으로 학생 인권을 초월하는 존재이고 싶어 하는 학생들도 학교 붕괴의  내적인 원인이 아니란 말은 아니다. 원인이 무엇이든 학교 붕괴의 궁극적인 원인은 학부모가 교사의 손을 놓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면 잘못된 분석일까?


  연못을 흐리는 것은 미꾸라지 몇 마리라고 했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학교를 지배하고 싶었나 보았다. 자기 아이를 이무기쯤으로 대우받게 하고 싶었나 보았다. 선생을 교사가 아닌 교노(敎奴)쯤으로 깔보고 싶었나 보았다. 인터넷 사회관계망(SNS) 모임방에서 교노쯤 어떻게 무시하고, 뒤흔들고, 괴롭혔는지 영웅담을 쏟아놓으며 스타가 되고 싶었나 보다. 다른 미꾸라지들과 함께 학교의 기둥뿌리 한둘쯤은 쉽게 뽑아버릴 수 있다고 우쭐거리고 싶었나 보다. 회초리를 빼앗긴 선생들의 여린 손을 마음껏 비웃고, 몰아붙이는 게 즐거웠나 보다. 학부모가 말하는데 어디 감히 눈을 똑바로 뜨느냐며, 교노(?) 그들에게 호통을 치며 분개할 수 있는, 교육의 윗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나 보다. 학교에 들어온 새로운 법률 법령을 앞세워 이제 자기들이  교단을 조련하는 주인이라 주장하고, 또 받아들이라 강요하고 싶었나 보다. 민주주의 시민사회라는 게 공무원들을 노예로 가진 공화국인 줄로 착각하고 있나 보다. 아이의 담임선생에게 예전 자기가 학생이었을 적에 자기 손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던 회초리의 억울함까지 얹어 되갚고 싶었나 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잘 자라고 있을까? 민주시민의 자질을 갖추어가며 건강한 사회인으로 제대로 성장하고 있을까? 친구들과 기회를 공평하게 나누고, 정한 차례를 지키며, 자신의 생각은 반에서 1/23에 불과할 뿐이라는 겸손을 잘 익혀가고 있을까? 그러한 겸손이 모여 대의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을까? 참을 줄 알고, 양보할 줄 알고, 더불어 함께 참여하는 협동심을 길러가고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힘을 쓰면 안 된다는 것과 자기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평안해야 한다는 것은 잘 배우고 있을까?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악담을 퍼부어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합리적인 이유가 있으면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은 배웠을까?


  학부모로서 부모는 자식들에게, 다른 사람을 위협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고함을 지르는 것도 폭력이라는 것을 바르게 가르치고 있을까? 그걸 부모로부터 배우지 못한 그들의 자식들이 교실에서, 교사와 반 친구들에게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 그들은 알까? 진상 학부모라고 개탄하는 사회의 한숨이 자기를 두고 터뜨리는 한탄인 줄, 그들은 알기나 할까?


  흔들리는 운동장, 교실, 과학실에서 교사들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잘 교육할 수 있을까? 교권도 없는 것들이 감히 자기 자녀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저들의 막무가내에 어떻게 대응하여야 할까? 훌륭한 농사꾼들은 벼농사짓는 논에서 키를 돋우고 있는 '피'를 뽑아낸다. 벼들이 똑 고르게 잘 자랄 수 있도록 물을 고루 대주고, 햇살이 고루 내리쬐길 기원한다. 벼는 벼들끼리 자라야 한다. 밭농사도 마찬가지다. 밭에 잡풀들이 함부로 섞여들지 않도록 밭두둑을 만들어 들과 밭의 경계를 지어준다. 당연히 함부로 밭에 기어들어오는 환삼덩굴은 과감히 걷어낸다. 농부의 손엔 사회가 효율적으로 개발한 예초기와 잘 벼린 낫이 들려 있다. 학교를 농사짓는 손엔 무엇이 들려 있는가? 사회는 그 손에서 매를 거둔 대신(매는 반인권 수단이므로 반드시 없어졌어야 할 것이 없어진 것이지만, 대신 다른 교육적 수단이 마련되었어야 했거늘) 무엇을 들려주었는가? 혹시 사회는 지금 저들이 맨손 농사를 짓고 있는 중인 것을 알고나 있을까? 


  대충 마무리 지을 일이 아니다. 백 년을 보고 짓는 농사이니 좀 더 꼼꼼하게 농사지을 수 있는 환경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교육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여러 차례 모여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결과라야 한다. 학교는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싶다. 우리의 미래를 잘 가꾸고 싶다. 미봉책의 교육정책이 대충 발표되었을 때, 그게 뭐냐며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학부모도 적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선생님을 응원하라는 말이 아니다. 교육을 응원하고, 교육을 보살피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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