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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나무 Sep 21. 2022

딸바보, 아빠

 너를 가졌다고 했을 때 아빠는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거나,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으셨어. 네가 태어난 후에도 저렇게 무덤덤한 반응이면 어떻게 하나 하고 나는 아빠를 의심했지.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건 책임감이 앞서는 아빠의 성격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빠는 너를 만날 준비를 하셨어. 먼저 네가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음악을 고르기 시작하셨어. 모차르트와 바흐를 비롯한 서양 클래식 음악과 김영동 씨의 우리나라 전통음악, 그리고 기타 연주 곡과 아빠와 엄마가 좋아했던 대중가요 몇 곡도 섞어서 카세트테이프 3개를 만드셨지. 태어난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너를 광주에 두고 왔고, 우리가 없는 광주에서 네가 아빠, 엄마와 함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 주시려고 외숙모께서는 너를 위해 그 테이프를 자주 틀어 주셨다고 하셨어.


 아빠는 너의 이름을 직접 지으셨어. 서점에 가서 작명 책을 사서 읽으시면서 어떤 이름이 의미도 좋으면서 부르기도 좋을까 많이 고민하셨지. 나는 너의 이름에 ‘해’자를 넣고 싶어 했는데 이름에 ‘바다’의 의미가 들어가면 안 된다며 획수와 필순 등을 고려하여 소리가 비슷한 ‘혜’를 선택해서 이름을 지으신 거야.


 내가 산후 휴가를 마치고 복직을 하자 너는 아침 일찍 이모님 댁으로 가야 했어. 아빠는 매일 출근길에 너를 안고 나가셨었지. 그때는 자가용도 없던 때라 아침 7시가 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너를 안고 7분 정도 거리에 사시는 이모님 댁으로 가셨어. 다행히 아침잠이 없는 너는 백일이 갓 지난 때였는데도 7시가 되기 전에 깨서 똘망똘망 눈망울을 반짝였지. 아빠는 네 동생이 태어나기 전 3년 동안을 그렇게 매일 너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셨어. 지금도 현관문을 나서던 두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라. 아빠의 듬직한 어깨 위에 얼굴을 얹고 활짝 웃고 있던 너와 아빠의 뒷모습. 


 서구 사대주의가 아니냐는 나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늘 외국 생활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계셨어.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오는 것인가 봐. 아빠는 석사 과정의 학비와 생활비, 그리고 급여, 가족의 건강 보험료, 항공료, 이사비 등을 지원해 주는 국비유학 프로그램에 지원을 하시고 최종 선발되셨어. 아빠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어. 20년 정도 손을 놓았던 영어 공부를 3달 남짓 하실 때는 정말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셨어. 


 네가 초등학교 5학년 1학기를 마치고 우리는 캐나다로 떠났지. 최종 선발 후 나 그리고 너, 동생은 그냥 떠날 날만을 기다리면 됐지만 아빠는 정말 바쁘게 많은 것을 준비하셨어. 인터넷으로 임시로 거주할 홈스테이와 렌트할 집도 미리 알아보시고, 너희를 어떤 학교에 보내는 것이 좋을지 캐나다의 교육과정과 교육시스템 등을 알아보시며 하나하나 체크해 나가셨어. 짐 일부는 배로 부치고 나머지 짐들을 8개의 이민 가방에 넣고, 우리가 캐나다 오타와로 향했던 그날, 8월 2일. 너도 당연히 기억날 거야.


 그곳은 한국보다 한 학기가 빠르니까 너는 6학년, 동생은 3학년이 되었지. 우리가 2년간 캐나다에 가서 산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은 ‘두 아이가 영어 공부하기에 딱 좋은 시기에 가게 된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어. 아빠가 프로젝트에 지원해서 선발되기까지의 과정과 그곳에서 2년 동안 살기 위한 준비부터 돌아오기까지의 힘들고 복잡한 모든 과정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빠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겠지만, 가족을 위한 마음이 더 컸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무엇보다 너와 네 동생이 새롭고 좋은 환경에서 잠시나마 공부하고 생활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크셨거든.


 그곳에서 아빠는 마흔넷의 나이에 스케이트와 스키를 처음으로 배우셨어. 아빠가 얼마나 몸으로 하는 것, 특히 운동을 싫어하시는지 나는 알지. 그런데 겨울이 길고 추운 곳,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에서 깨끗한 얼음과 눈의 스포츠를 즐기지 않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하시며 너희 둘이 스케이트와 스키, 그리고 스노보드를 배울 수 있도록 하시며 아빠도 함께 배우신 거지. 아빠가 그때 스키 타다가 넘어지셔서 새끼손가락에 금이 갔었던 것 너도 기억하지? 너랑 네 동생은 아빠가 넘어지시는 모습이 우스워 한참 웃었다고 하시며 아빠는 섭섭하다고 농담을 하셨던 것도 기억날거야. 미리 계획한 가족여행이 있어서 치료도 제대로 못했던 것도 생각날 거야. 그것 말고도 너에게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 준다며 암벽등반, 스킨스쿠버 등에도 너를 데리고 가셨지.


 한국에 돌아와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 국어나 사회보다는 수학이나 과학을 잘하는 너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외국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외고를 선택했지. 그때는 외고에 국내반과 국제반이 있어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했는데 나는 네가 유학을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 학비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네가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이 더 마음에 걸렸고. 하지만 아빠는 네가 좀 더 좋은 교육환경에서 대학을 다니기 바라는 마음에서 유학을 보내고 싶어 하셨어. 어린 네가 학비를 걱정하자 아빠는 미국 대학의 장학금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고, 너는 ‘그 장학금을 제가 받으면 되겠네요.’라고 자신 있게 말하며 외고 국제반에 입학하게 된 거지.


 외고 국제반의 공부량은 상상을 초월했지. 정규 수업의 국내반 공부에, 방과 후에는 유학을 위한 공부를 따로 해야 했으니까. 너는 공부할 힘을 내려면 아침에 고기를 먹어야겠다고 우리에게 주문했고, 그날 이후 아빠는 너를 위해 아침에 고기를 굽기 시작하셨어. 우리도 출근을 해야 하는데 아침에 고기를 구워 먹는다는 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닌데도, 아빠는 그 어려운 것을 기꺼이 하신 거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인데 말이야. 


 친구들이 너에게 물었지

 “너는 왜 교복 팔에 주름이 잡혀 있어?”

 “글쎄, 우리 아빠가 이렇게 다려 주시는 거야.”

 아빠가 네 교복을 다려준다는 말에 친구들은 모두 놀랐지. 세상에 그런 아빠는 흔치 않거든.


 네가 고3이 되자 대입 원서를 써야 했지. 너랑 아빠는 네가 가고 싶어 하는 대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지원서를 낼 학교를 결정하는 모든 과정을 함께 했지. 다행히 수시 얼리 디시전(early decision)으로 단 한 대학에 원서를 냈는데 합격을 해서 우리 모두 기뻐했던 것 기억날 거야. 대학 2학년을 마치고 미국에서 파리로 교환학생을 갈 때도 아빠는 늘 너에게 넓고 멀리 보라고 조언해 주셨지. 


 3학년을 마치고 홍콩에서 두 달 동안 인턴을 한 결과 졸업 후 일하게 될 직장이 정해지자 아빠는 너를 무척 자랑스러워하셨어. 그리고 졸업 후 8년 동안 뉴욕에서 일을 하며 커리어를 쌓고,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돌아온다고 네가 말했을 때, 아빠의 기쁜 마음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 사실 나는 직업적인 성공보다 인간적인 면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덜 한데, 아빠는 네가 자신감을 갖고 진취적으로 일하는 것을 무척 대견해하셔. 

 딸바보 아빠의 너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일일이 말로 다 할 수 있겠어.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으니까 아빠도 너의 마음을, 너도 아빠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를 향한 아빠의 사랑은 딸바보임이 분명해 보여.


 요즈음 아빠와 너를 보며 사십 중반에 스케이트와 스키를 배우던, 그리고 아침에 너를 위해 고기를 굽던, 너의 하얀 교복 블라우스 소매에 칼주름을 잡던 아빠가 떠올라 코끝이 찡해지곤 해. 어찌 보면 아빠로 산다는 것은 쌉싸름한 맛의 애처로운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아빠가 여전히 딸 바보임을 네가 오래오래 기억하고 잊지 않기를 바라며 불현듯 이 글을 쓰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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