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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원 Jul 23. 2024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중앙선 3

간이역

간이역, 역장이 상근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역을 간이역이라 부른다. 열차가 정차하지 않거나 아주 적은 횟수로 정차하는 간이역은 다양한 느낌으로 다가선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간이역에서 추억과 그리움을 떠올리고, 머물지 않고 떠나가는 열차를 바라보며 고단한 인생을 떠올리기도 한다. 중앙선의 간이역 치악역과 신림역은 우리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치악역 역사


치악역은 1956년 신호장으로 출발했다. 신호장이란 승객이 타고 내리는 정거장이 아니라 열차가 교차 운행할 때 반대편에서 오는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대피할 수 있는 선로와 신호기를 설치한 정거장이다. 신호장에 대피한 열차는 승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안내 방송을 했다.     


"우리 열차는 신호 대기를 위해 잠시 정차했습니다. 잠시 후 다시 출발할 예정입니다."     


치악역이 신호장에서 보통역으로 승격된 시기도 있었다. 1958년부터 1977년까지였다. 이 시기에는 치악역에서도 승객들이 타고 내렸다. 하지만 1977년 다시 신호장으로 격하되면서 여객 취급이 중단되었다.     

치악역은 백척철교에서 연결되는 또아리굴로 유명하다. 육중한 열차가 시멘트나 목재 등의 화물을 싣고 험준한 치악산을 정상적으로는 오를 수 없어, 360도 회전하여 오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터널을 또아리굴이라 한다.

     

일제 강점기 치악산에 또아리굴을 뚫는 난공사에 동원된 조선인들 중에 사고로 죽거나 다치는 일도 많았다. 백척철교 공사와 더불어 동원된 조선인들의 고통과 애환이 서린 역사의 현장이다.  신림역은 1941년 원주~제천 구간 개통 당시 보통역으로 운영되면서 여객 수송이 시작되었다. 6.25 전쟁 때 역사 건물이 불에 타 1952년 가건물을 지어 운영되다가 1961년 정식으로 역사가 들어섰다. 현재 신림역 건물은 1961년에 지은 것이다.     


신림역 역사


신림역 역사에는 성황림을 그렸다. 성황림은 마을을 지키는 신령스러운 나무 90여 그루가 있어 사람들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신림 성황림이 마을과 사람들을 지켜주듯이 신림역에 그려진 성황림이 안전한 철도 여행을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린 것일까?     


반곡역, 신림역이 개통되면서 치악산 일대 산에서 원시림이 벌목되었다. 건축자재, 철도 침목, 전신주, 광산 갱목, 생활용 화목 등의 용도로 벌목된 목재는 반곡역, 신림역을 통해 대량 수송되었다. 신림역 개통 이후 전국에서 벌채꾼들이 몰려들었고 벌목된 나무를 운반하는 우마차 수요가 증가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전쟁 복구 과정에서 필요한 주택, 건설 자재 수요가 증가해서 원목 가격이 폭등했다. 베어낸 원목을 쌓아놓을 장소가 부족해서 역 주변 논에까지 쌓일 정도로 무차별 벌목이 이루어졌다. 원목을 수송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신림역 역장에게 뇌물을 바치는 목재상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 시기가 신림역 일대의 최대 호황기였다.     


1969년 중앙선 철도가 전철화되면서 1973년 청량리~제천 노선 철도가 전철화 되었다. 이후 디젤 기관차는 화물 수송에, 전기 기관차는 여객열차로 운행되었다. 청량리~제천 구간에 무궁화호, 새마을호 등 빠른 열차 운행이 증가하면서 신림역은 이용 승객이 급격히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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