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 일지」여섯 번째: 나의 집 방황기(1)

해방으로 나아가는 삶의 발자취

by 나른한여우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우리집 또한 제각각으로 불행한 가정 중 하나였다.


당신 인생의 첫 기억은 언제인가? 나의 인생 첫 기억은 4살. 도시에서 살다가 형편이 어려워져 시골의 고모집으로 이사오던 날이다. 트럭에 이삿짐을 실고 한참을 달려 고모댁에 도착했을때, 환하게 반겨주던 고모의 모습이 나의 인생 첫 기억이다. 낯선 시골 동네에 내려온 우리 가족은 이후 10여년 동안 고모집에 얹혀 살았다. 천장의 쥐들이 매일 밤 달리기 시합을 하고, 바퀴벌레와 숨바꼭질 하는 집이었지만 네 명의 한 식구가 살기에는 나쁘진 않은 환경이었다. 서울 태생인 엄마, 아빠와는 달리 그곳이 나의 고향이 되었다.


시골로 내려온 어머니와 아버지는 과일 가게를 차렸다. 과일을 좋아하던 어머니께서 제안하셨으려나? 덕분에 잠깐이지만 포도, 사과, 자두, 복숭아, 감, 귤까지 계절따라 제철과일을 양껏 먹을 수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면 과일을 보관하는 냉장 창고에 몰래 들어가 더위를 식힐 때도 있었다. 냉장 창고에 들어가면 폐쇄된 공간이 주는 공포감과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묘한 안락함이 동시에 느껴지곤 했다. 아쉽게도 나만의 아지트 삼았던 냉장창고는 얼마되지 않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과일 가게를 그만 두셨기 때문이다. 너무 어렸을 때라서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지만, 결국 돈 문제이지 않았겠나 싶다.


이후 아버지는 돌공장을 운영하시는 고모의 일손을 돕거나, 잔디 유통하는 일을 했다. 몸을 주로 쓰는 소위 막일도 가리지 않고 하셨다. 어머니도 급식 시설의 식당 보조, 분식집 아르바이트, 공장 생산직을 두루 아우르며 여러 일을 쉬지 않고 하셨다. 하루 하루 삶의 무게를 지는 것만으로도 벅찰만 한데, 어머니와 아버지는 매일을 부부싸움으로 끝맺었다. 이제서야 떠올려보면 지나친 삶의 무게에 투정에 가까운 싸움이었을지 모르겠다. 싸움의 구체적인 이유는 다양했지만 대부분 싸움의 중심에는 돈이 있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어린 시절 나는 매일 밤 오늘은 부모님이 싸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잠에들었다. 하루는 술에 취한 아버지가 어머니와 다투고 나서 분에 못이겨 화장실의 양변기를 모두 부숴놓은 적이 있다. 한적한 시골동네에 울리는 큰 소리에 고모가 싸움을 말리려고 집에 찾아왔고, 흥분한 아버지를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깨어진 양변기 조각에 다치셨는지, 잠시 후 고요함을 되찾은 집에는 아버지의 피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혀 있었다. 그 때의 우리 집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과는 거리가 꽤 멀었다.


머지 않아 우리 가족은 원래 살던 곳과 떨어진 동네의 한 빌라에 입주했다. 하지만, 지금과 물가 차이가 있다지만 월세가 겨우 10만원이었던걸 생각해보면 썩 좋은 집은 아니었다. 장마철이면 여기저기 새는 비를 막기에 바빴다. 지금은 똑딱똑딱 시침이 돌아가는 아날로그 벽시계의 건전지까지 모두 뽑고나서야 잠에들 수 있는 내가, 그때는 어떻게 똑똑 비가 새는 소리에 자장가 삼아 잠에 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 마저도 어머니 아버지의 싸움의 이유가 되었다. 그 빌라의 집주인은 부모님과도 친분이 깊은 관계였는데, 그래서 우리는 겨우 10만원에 그 집에서 살 수 있었다. 어머니는 거의 거저에 사는 것인데 새는 비는 알아서 해야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던 반면 아버지는 아버지는 월세가 얼마던지 집주인이 기본적인 보수를 해줘야한다는 입장이었다. 사소한 입장 차이가 또 큰 싸움을 만들어 냈다. 성인이 되어 그 일에 대해 생각해 본 결과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틀린 바 없이 맞다는 것이었다. 다만 두 분 다 상대방의 생각이 옳다고 양보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천천히 설득시킬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내가 조금 곤란했던 것은, 집주인의 큰 아들이 우리 형이랑 동창이였던 것이다. 작은 아들은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었는데, 가끔 여러 동네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갈등이 골이 깊어질 수록 집주인과의 갈등도 깊어졌고, 형과 나는 괜히 친구들을 잃게되는 꼴이 되었다.


한 번은 무슨 연유였는지 또 큰소리가 났다. 엄마는 안방에서 쫒겨났고, 아버지는 안방 문을 걸어잠궜다. 집에 나설 때도 아버지는 안방 문을 잠군채로 나섰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 이삼일쯤 흐른 후에 갈아입을 옷과 이것저것 생활 용품이 필요해진 어머니는 형을 시켜 창문을 넘게 했고, 형은 안전장치 없이 배란다 창을 너머 안방 문으로 들어가 잠겨있던 문을 열었다. 안방 바닥에는 깨어진 맥주컵과 눌러붙은 맥주 자국이 있었다. 또 큰 소리가 났던 어느 날은 놀라서 일어나보니 집 앞에 앰뷸런스가 도착해 있었다. 아버지가 던진 컵의 파편이 어머니의 팔에 생채기를 냈다. 그날도 역시 어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집'은 결코 온전한 집의 역할이 되어주지 못했다. 아마 어머니께서 진정 의지했던 '집'은 교회였다. 어린시절부터 교회에 다녔던 어머니의 결혼 조건은 아버지가 함께 교회를 다니는 것이었다. 너무나 싱겁게도 아버지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어머니는 교회에서 하나님께 의지하며 지친 몸과 마음을 돌보았다. 나 또한 그런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교회 중고등부 임원이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중고등부 교사를 자청하기도 했다. 매일이 전쟁이던 어머니에게 교회가 집이였듯, 나도 교회를 나의 집 삼았었다. 내가 교사라는 꿈을 품게된 것도 역시 교회를 통해서였다. 주일이면 거의 종일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어머니를 보고 아버지는 '신자'를 넘어선 '환자'라고 표현했다. 수요일에는 수요예배, 금요일에는 철야기도, 부흥회 때는 몇박 몇일을 교회에 있으니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의 시선에서는 그럴만 한 것 같기도 하다. 어렸을 때는 교회에 함께 다니지 않는 아버지가 마냥 답답했지만, 커서 생각해보니 크리스마스, 연말 등 중요한 날에는 어머니, 형, 나 모두 교회에 가 있으니 아버지도 꽤 긴 시간 외로움을 견뎠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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