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휴직은 딱 1년이었지만 그 기간 동안 업에서 마음이 완전히 멀어져서 그런지 복직 후에 직장인이라는 아이덴티티가 예전처럼 자연스럽지가 않다. 어느 나이를 지나면 좋고 싫고를 떠나서 직업이라는 게 그냥 삶의 일부가 되어 받아들이고 살기 마련인데, 요새는 그걸 요모조모 돌려보게 된다. 그렇다고 이제와 다른 업을 찾아갈 만큼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이 직업/직장이라는 조건에서 그나마 나에게 맞는 길은 무엇일까 생각이 많아진다. 그건 휴직 중에 내가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을 확실히 경험해서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 능력의 부족함이 눈에 밟혀서이기도 하다.
원래 공부든 미술이든 체육이든 잘해야 재밌고, 계속 열정을 쏟게 되고, 그러다 보면 더 잘하는 선순환이 이뤄지는 건데 일에서도 비슷하다. 요새 업무적으로 내가 못하는 부분이 계속 걸리적거려서 참 재미가 없다.
학창 시절에 열심히 공부를 하다 보면 과목에 따라 본인의 장단점이 눈에 보이는데 내 경우는 물리에서 '힘', 수학에서 '확률'이 나오면 다른 공부 과목이나 과정에 비해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대학에 가서도 벽에 부딪치는 부분, 성과가 잘 나오는 부분들을 겪으면서 깨달은 건 나의 수리적 능력이 경제학 전공자로서는 크게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진로가 좁아지는데, 단순 암기능력도 부족했다. 대략적인 스토리를 빠르게 파악하고 단기적으로 외우는 것은 잘한다. 하지만 장기 기억력이 약하고, 디테일을 챙기지 못하고, 정무적 감각이 둔하고, 리더십을 가지기 싫어하며, 복잡한 절차에 취약했다. 그리고 체력이 약하다.
그리고 이런 강점과 약점은 일할 때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금융업 종사자인데 수리 능력이 떨어지니 일상적으로 긴장감이 높고, 연차가 높아지는데 관리자 자리는 싫고, 복잡한 절차 앞에서 작아진다. 하지만 전체 그림과 스토리 라인은 금방 파악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의 엉성함을 눈치채는 데 시간이 걸린다. 요새는 그런 나름의 장점이 쇠락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복직해서 완전히 새로운 업무 분야에 가니 업무 지식이 없는 건 당연하니 배워나가려니 하는데, 그 외에 내가 취약한 부문의 능력을 굉장히 많이 요해서 죽을 맛이다. 카운터파트가 너무나 다양하고, 업무 절차 각 단계마다 국내외를 오가는 세부 절차가 따라붙고, 창의성과 유연성을 발휘해서 상황을 주물러야 하고, 유념해야 할 비율과 숫자들이 많은데 다년간의 경험상 이건 내가 오 년을 봐도 숙지하지 못할 영역이라는 게 느낌이 딱 온다. 높으신 분들의 관심이 많은 업무라 정무적 센스도 필요하다.
요새 같이 일하는 동료나 상사 등과 이야기를 해보면 똑똑함이 확연히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이 나보다 많은 건 당연하고 새로운 업무에 기꺼이 달려드는 호승심, 따로 시간을 내어 관련 분야를 공부하는 열정, 현재 상황에서 부족하거나 필요한 부분을 적확히 집어내는 판단력, 여기저기 연락하고 절차를 챙겨서 일을 진행시키는 추진력, 보고의 방향을 잡아내는 정무적 감각 등등 소위 일머리가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아, 이들은 똑똑하고 나는 능력이 부족하구나.' 그런데, 굳이 그 갭을 메우고 싶은 생각도 안 든다.
물론 나도 눈에 띄는 펑크는 내지 않는다, 아직은. 1인분은 한다. 하지만 그 이상을 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선까지는 소득 감소와 업무시간 축소를 상호 교환할 용의가 충분하다. 남편은 이런 나의 애티튜드가 문제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나는 (절친한 학창 시절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십 대 시절부터 복지부동과 안빈낙도를 꿈꾸던 인간이라 어쩔 수 없다. 그런 인간 치고는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
내가 특별히 능력의 부족을 느끼지 않는 업무들도 있었다. 뛰어나진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게 적절히 업무할 수 있는 영역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안 그래도 회사에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내 현실이 아니었으면 싶은 마당에 매 순간 자신의 무능을 절감하며 업무를 하려니 참으로 괴롭다.
그런데 원래 세상에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많은 건가? 요새 주변을 보면 석사도 너무 많고, 자격증 따는 사람도 많은데, 그런 겉으로 보이는 증표와는 상관없이 일 잘하는 사람도 많다. 이건 질투나 자괴감이랑은 상관없이 그냥 팩트로서 느끼는 바다. 그런 흐름을 보다 보면 '나는 내 살 길을 찾아야겠다. 똑똑한 사람들 화이팅.' 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저런 사람도 계속 회사를 다니는 걸 보니 나는 부끄럼없이 회사를 다녀도 괜찮겠군'이라는 위안을 주는 사람도 있긴 하다.)
꼭 업무가 아니래도 살림이나 자기 취미나 생활을 꾸려나가는 능력이 대단히 폭넓으면서 야무진 사람도 있고, 나와 똑같은 폰인데 나는 알지도 못했던 아주 다양한 기능을 적재적소에 잘 사용해서 감탄스러운 사람도 있고, 동네에서 인간관계를 잘 맺고 돌아가는 상황 파악을 잘하는 점에서 뛰어난 사람도 있다. 그리 생각하다 보면 누군가에게는 나의 어떤 면이 똑똑해 보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업무적으로 똑똑한 사람들을 정말 존경하지만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도태되고 싶은 것도 아니기에 나도 석사를, 혹은 해외근무를, 혹은 자격증 취득을, 혹은 특정분야의 업무를 해야 될까 라는 고민이 가끔 든다. 하지만 그 타이틀을 취득하기 위해 해내야 하는 콘텐츠가 전혀 내 취향과 적성에 안 맞고 그 타이틀을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런 동기부여 안 되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쏟아야 할 체력과 시간이 너무 아깝다. 학창 시절을 포함해서 지금까지는 그냥 주어진 역할-공부하고, 적당한 전공을 선택하고, 그에 맞춰 취업하고, 회사일을 하고-에 충실하게만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어떤 식으로 내 나름의 똑똑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어디에 나를 몰입시킬 수 있을까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이런 게 중년의 위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