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기석의 정체
동기들과 후임들과 구내식당에 들어선 기석은 경찰서 직원들이 기석을 바라보는 온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음식을 뜨는데 소시지 부침을 한 개 더 얹어주는 조사계 과장의 전에 없던 친절과 또 밥을 먹는 직원들이 힐끔힐끔 기석을 보는 것 같은 느낌, 무엇보다 시끄럽게 쩝쩝거리며 밥을 먹기로 유명한 최경장이 아주 조용히 교양을 떨며 식사 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기석은 어제의 전화 사건으로 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이 나수경 많이 먹어"
아니나 다를까 식판에 밥을 뜨던 형사과장이 식당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던진 인사에 배식을 하시던 김여사 님이 놀라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기석을 바라보았고 기석은 가벼운 목례로 답하고 자리에 와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수경 님.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눈치 없기로 소문난 유진섭 이경이 기석에게 물었다.
"뭐가 이상해?"
"오늘따라 구내식당이 너무 조용해서 말입니다."
"다들 조용히 식사하고 싶은 거겠지"
"아닙니다. 제가 똥촉이긴 한데 오늘 좀 이상합니다."
"유이경. 쉰소리 말고 어서 밥 먹어"
"넵 알겠습니다."
진섭은 열심히 밥을 먹었고 기석은 점점 굳어가는 자신의 표정을 누군가가 관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밥이 모래알처럼 느껴졌다.
"나수경 면회"
최경장이 손수 내무반까지 찾아와 기석에게 면회자가 왔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어제는 전화 오늘은 면회. 전역 한 달 앞두고 이게 무슨 일인가?'
기석이 한숨을 쉬며 면회실로 들어서니 낯익은 얼굴이 환하게 웃으며 기석을 반겨 주었다.
"아들 엄마 왔어"
"엄마 여기가 어디라고 이 먼 길을 오셨어요?"
기석이 엄마를 만나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최경장은 뭔가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면회실을 관찰하다 사라졌고 기석은 그 모든 상황을 놓치지 않으며 반가이 인사를 건넸다.
"엄마 어떻게 된 거예요? 귀뜸이라도 해 주시지"
"아이고 아들. 얼굴 야윈 것 좀 봐."
면회실 뒷문에서 기석의 볼을 만지고 머리를 쓰다듬는 면회객을 보고 있던 형사과장도 그 모습을 지켜보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나갔다.
"기석학생. 지켜보던 사람들은 다 사라졌고 오늘은 내가 엄마인척 확실하게 하고 가야 하니 내가 하는 대로 따라줘요"
"아니 여사님 어떻게 된 거예요?"
"청장님이 어제 퇴근하셔서 사모님 하고 대화하시다가 아무래도 기석학생 정체 들킨 거 같다고 걱정하셔서 이런 연극판을 짰죠. 내가 먼저 엄마라고 말하면 기석학생이 눈치채고 맞춰 줄거라 걱정 않고 왔고, 근데 나도 좀 떨렸어요. 호호. 음식도 일부러 시골서 해 온 것처럼 방앗간에 가서 직접 담고 포장하고 기석학생 좋아하는 식혜랑 바나나도 박스로 싸왔으니 나눠 먹어요."
"아버지 장난기 때문에 여사님까지 이렇게 배우로 뛰시고. 죄송하고 감사해서 어떡해요. 근데 정말 배우처럼 너무 자연스러우셨어요. 오히려 제가 NG 낼뻔 했잖아요"
"아이고 기석학생 그런 말 말아요. 나는 첨엔 좀 떨렸지만 재밌고 좋은데 뭐. 내가 원래 소싯적에 탤런트가 꿈이었는데 식모살이하느라 면접인가 뭔가를 못해서 그렇지 이참에 더 늦기 전에 연기를 한 번 해볼까?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지금 사모님이 주차장에 계세요. 멀리서나마 기석학생 보고 가신다고"
"그런데 아주머니가 기사 딸린 차를 타고 가시면 이렇게 연극하신게 의미없어 지잖아요."
"그래서 기석학생은 경찰서 밖에서 나를 택시만 태워주면 되고 사모님이 기석학생을 지켜볼 테니 그런 걱정은 말아요"
"음식 준비해서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감사히 잘 먹을게요. 아직 봄바람이 차니 감기 조심하시고요"
"내 걱정은 말아요. 남은 기간 잘 보내고 말년 휴가 때나 만나요. 기석 학생 좋아하는 새우장이랑 전복장 많이 해 놓고 기다릴게요"
그때 의심을 끝을 놓지 않은 형사과장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면회실로 들어오자 김여사가 기석을 안으며 말했다.
"아들. 엄마 고속버스 시간 맞추려면 이제 나가야 해. 자 한 번 더 안아보자"
"엄마 제가 택시 타는 곳 까지 배웅해 드릴게요. 말년 휴가 때나 만나요"
"아 나수경 어머니 이제 가십니까?"
"아 네. 저희 기석이 잘 좀 부탁드립니다."
"아 네네 워낙 훌륭한 인재라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걱정 마시고 먼 길 조심히 가십시오"
"이거 별건 아니지만 시골에서 해 온 음식이니 맛이 없더라도 드셔주세요."
"아이고야 뭘 이렇게나 많이 준비하셨습니까?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형사과장은 말은 유창 했지만 음식이 싸인 보자기 더미를 보며 짓는 애매한 표정을 다 숨길 수는 없어 보였다.
"사모님 저기 기석학생 나오는대요"
"아니 얼굴이 왜 저렇게 야위었어? 어머어머 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네"
경찰서 주차장에서 대기 중이던 기석의 엄마는 기석과 모자 역할 놀이로 팔짱을 끼고 나오는 김여사를 보며 부러운 맘이 들었다. 지난번 휴가 때 보다 부쩍 야윈 아들의 얼굴을 보다가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얼른 손수건으로 찍었다.
"사모님 어떻게 차를 뺄까요?"
"김여사가 택시를 타기로 했으니 우선 경찰서 정문으로 나갑시다."
경찰서 정문의 보초병 위치를 지나 택시를 잡고 있는 기석과 김여사를 본 김기사는 유리창을 내리며 기석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길좀 묻겠습니다. 여기 주안동으로 가려면 좌회전입니까? 우회전입니까?"
기석이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주안동으로 가시려면 좌회전하신 뒤 오백미터 정도 가셔서 우회전하시면 됩니다."
"네 고맙습니다."
"안전 운전하십시오"
김기사와 인사를 건네는 기석을 보며 뒷자리에 앉아 있던 기석의 엄마는 또다시 눈물을 훔쳤고 뒷자리에서 울고 있는 엄마를 보고 기석도 목이 메었지만 그 찰나 도착한 택시에 가 와서 김여사를 택시에 태우고 멀어져 가는 택시와 승용차를 향해 힘껏 양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나수경 님 어서 와서 떡 드시지 말입니다. 이거 무슨 떡인지 정말 맛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식혜와 바나나는 처음 먹어봅니다."
내부반에 들어서니 유진섭 일경이 바나나를 먹다 말고 급하게 일어나 말하고 있었다.
"그래? 맛있으면 많이 먹어"
3소대 후임들이 너나없이 잘 먹겠다고 인사를 해오자 기석은 됐다는 듯이 손을 휘이휘이 저으며 바나나를 하나 집어 들고 먹었다. 휴가 때 먹었던 바나나 맛보다 더 달콤하고 맛있는 맛을 보니 김여사 님이 얼마나 공들여 음식을 준비했는지 짐작이 갔다.
"나수경 떡이랑 잘 먹었어"
복도에서 마주친 최경장이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입에 맞으셨습니까?"
"내가 원래 떡을 잘 안 먹는데 시골 떡이라 정성이 가득해서 그런지 한 덩이 게 눈 감추 듯 먹었잖아. 나수경 특출한 거야 알았지만 어머니가 전역 한 달 앞둔 아들 격려한다고 그 먼 곳서 음식을 싸서 직접 서까지 오시고. 역시 대한민국 최고의 B대학 수석입학자는 틀리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말인 줄 알았는데 꼭 그것도 아닌가 봐"
최경장은 혹시나 하고 의심했던 기석의 존재가 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서 신이 난 것 같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사무실로 들어가자 기석은 차라리 이 모든 것이 잘 됐다 싶었다.
"아 미주 씨. 어떡하라고 이렇게 주는 거야?"
고대리 놈이 또 시비를 걸어왔다.
"대리님이 준비해 달라고 하신 신고서류 날짜 별로 다 묶어서 드렸는데 뭘 더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이렇게 주면 내가 일일이 화면이랑 비교하면서 계산기로 더해야 하잖아. 아직도 그렇게 일이 감이 안 잡혀?"
오늘은 얼마큼 사람 염장을 지르려나 궁금하지도 않은 그 찰나 미주가 말을 이어갔다.
"대리님이 원하시지 않은 파일이라서 드리진 않았는데 여기 디스크에 신고서류 누계 담아 뒀습니다."
미주가 건넨 디스크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성의 없이 받아간 고대리는 깜짝 놀랐다. 디스크 안에는 현재 처리 중인 현주상사 세금 신고 관련 소요 금액들이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었고 누계까지 이상 없는 엑셀 파일이었다.
"미주 씨 퇴근하고 엑셀 학원이라도 다녔나 봐?"
무어라 대답할까 잠깐 망설이던 미주는 아무 말 않고 가볍게 목례를 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 담배나 한 대 피고 와야겠다."
굳이 묻지도 않았지만 고대리 놈은 자리를 비웠고 고대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오경이 미주의 자리로 의자를 끌고 다가왔다.
"미주 씨 대리님한테 뭘 준거야?"
"현주상사 발행된 세금계산서 누계 금액이요"
"대리님 트레이드 마크인 엑셀파일에 담아 줬다는 말이지?"
"네"
"이게 복이 될지 화가 될지 모르겠어. 엑셀은 자기만 잘한다고 큰소리 빵빵 치던 대리님이 미주 씨가 자기 치고 올라온다 생각하면 또 온갖 구실을 잡아서 시비 걸 텐데. 아, 일을 잘해서 문제고 못해서 문제고.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네"
오경이 끌고 왔던 의자를 다시 끌고 제자리로 돌아갔고 미주는 검토 중이던 서류들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오경의 말에 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7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