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와 호박씨

호박씨 까기는 어려워

by 별바라기

대포알 같은 파란 호박 한 덩이와 노란 호박 한 덩이가 싱크대 앞 고구마 박스 위에서 나를 몇 주째 감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걸 어떻게 무야 잘 뭇다 소문이 날까?"


호박을 보며 고민하는 내게


"꼭 소문이 나야 해? 죽 끓여 먹고 국 끓여 먹으면 되지"


"누가 그걸 몰라? 양은 많고 애들은 안 먹을 테니 하는 소리지"


"내가 많이 먹을게. 남으면 냉동실에 넣어두면 되잖아"


"그럴까? 또 애끼다 똥 되는 거 아니겠지?"


"부지런히 해 먹으면 되지. 나는 호박 좋아"




그러고도 며칠이 지났다. 여전히 나를 감시하고 있는 호박 두 덩이는 돌덩이 같은 무게로 나의 숙제가 되었고 드디어 나는 칼을 뽑았다.


"다들 나 말리지 마. 나 칼 있으마"


호기롭게 칼을 꽂았으나 허걱, 생각보다 호박은 단단했고 나는 꽂은 칼을 다시 빼지 못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어어 힘으로 하는 거 아니야. 그러다 다치는겨"


호박에 칼을 꽂고 손잡이를 붙잡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보고 남편이 다가와 결국 한소리 했고


"와 호박이 돌이야. 아더왕은 못 하겠다."


나는 자연스레 칼자루를 남편에게 넘겼다.


"우와 호박씨 엄청 많네. 버리긴 아까운디"


"아깝긴 해도 우째. 호박도 다 못 먹을 판에 호박씨까지. 눈 딱 감고 버리자"


"그럴까? 나는 이참에 호박씨 좀 까볼라 했지"


"ㅇㅇ이 호박씨 잘 까요?"


"눼눼눼"


나의 짓궂은 대답에 남편이 웃었다.


"그거 생각난다 여보. 겨울에 호박 해 먹고 나면 할머니 방에 호박씨가 하얗게 널려 있었는데"


"우리 집도 그랬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앞니로 간신히 까먹고 그랬는데"


"히힛 당신도 호박씨 좀 깠었네?"


"암만 그래도 누구만큼은 아닐 거야"




"야야 니 정지서 도마 떼기랑 칼 좀 들고 온네이"


할머니가 방바닥에 보자기를 깔며 주문하셨다.


"할머이 모 할라고?"


들고 온 도마와 칼을 건네며 여쭙자


"뭐 하긴 호박 따갤라 그라지"


"그래서? 그래서 뭐 해 먹냐고?"


"뭐 하긴 호박죽 쑤 물라 그라지"


"에이 호박죽 맛없는데. 근데 알은 느 줄 거야?"


"집에 아매 찹쌜깔이 읍을걸. 대신 호래이 콩을 늘까? 양대를 늘까?"


"아 싫어 호박죽도 맛 읍는데 콩을 느믄 우뜨케"


"낭중에 무 보고 말해. 맛이 있나 읍나. 그라고 저만치 나 앉으래이 호박 또개개"


나는 할머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아이고야 마들기도 마들기도 우째 이래 마든지 기운이 읍어 호박도 못 또개겠네"


할머니는 말만 그렇지 호박을 반으로 뚝딱 쪼개놓으셨다.


"니 여 바가지에다 호박씨 싹 발라논네이"


"호박씨는 왜?"


"왜긴. 말리가꼬 내년에 씨도하고 까묵을라 그라지"


그날 저녁 우린 아무 콩도 들어가지 않은 거친 누런 호박죽을 먹었다. 그리고 할머니방 윗목 고구마 박스 옆엔 진한 호박냄새 풀풀 풍기는 호박씨 몇 날 며칠 하얗게 널려 있었는데 자다가 잠이 깨면 윗목은 달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환해 보였다.




"빌나기도 빌나기도, 저 억신 걸 씹어 묵네"


호박씨를 까다 인내심 한계를 느낀 내가 껍질까지 우적우적 씹다 고소한 물만 빨아먹고 뱉어내자 할머니가 한소리 하셨다.


"할머이 이거 먹기 느므 힘들어. 누가 한 움큼 까서 주면 정말 좋겠다."


"이 마한, 니가 까서 나 좀 다오"


할머니가 내 속셈을 아시고 받아치셨다.




"엄마 나 멜론 먹어도 돼?"


"메론? 너 메론 사 왔어?"


"아니, 엄마가 사 온 거 아니야?"


"그거 진즉에 다 먹었는데"


"아니야 냉장고에 멜론이 있어"


작은 아이가 냉장고 문을 씩씩하게 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거 호박인디"


"호박이라고? 아니 호박을 왜 이렇게 정성스레 잘라 모셔놨어?"


"아빠랑 나랑 먹으려고 그랬지. 아까비 메론이라 하고 그냥 먹게 냅둘걸"


"엄마 나빠"


그리고 그날 저녁 여행에서 돌아온 큰 아이


"엄마 냉장고에 메론 있던데 먹을까요?"


"응, 맛있게 많이 먹어"


"엄마 웃음이 수상한데 메론 아닌 거죠?"




호박 한 덩이에 웃음이 묻어나는 저녁.

그리고 호박을 자르고서야 할머니의 기운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새삼 느꼈다. 더 더 큰 호박도 너끈하게 자르시던 근수저 할머니. 요즘 나의 근손실이 보이고 느껴지고 있어 슬픈 중이었는데 할머니처럼 근수저가 되기 위해 편식 않고 열심히 운동하는 겨울을 보내야겠다. 그리고 힘든 호박씨는 마트서 사다 먹는 걸로다.


그나저나 이 맛있는 호박씨는 왜 부정적인 어원으로 남아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