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냄새가 나는 날
겨울비치곤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하늘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첫눈 폭탄을 내리더니
만년설 같이 절대 녹지 않을 것 같던 응달에 있던 눈덩이들이 겨울비에 마법 같이 사라졌다. 이 익숙한 촉촉 온도와 비 냄새. 신기하게 냄새와 느낌은 시공간을 초월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할머이 꼬깨이는 왜?"
"왜긴, 산에 갈라 그라지"
"비 와서 진탕인데 가? 아직 땅이 얼었자네"
"비가 와 눈도 녹고 땅도 녹았으니 싹 잘 빌 때 가 및 뿌랭지 캐 와야지"
할머니는 곡괭이와 다래끼를 매고 산으로 가셨다.
"야야 누가 있나?"
구불구불한 연탄보일러 선에 맞춰 배를 깔고 책을 읽고 있는데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이 마이 캤어?"
나는 다래끼를 홀라당 뒤집어 우르르 쏟아 주섬주섬 약초들을 분리했다.
"우와 할머이 오늘은 더덕을 마이 캤네?"
"용하네. 인자 더덕도 가릴 줄 알고"
"인제 알지. 더덕은 껍데기가 찌글찌글하게 생겼고 도라지는 미끈하잖아"
"니 말이 똥글배이다"
할머니는 웃으며 더덕에 붙은 흙을 살살 털고 과도로 껍질을 벗기자. 향긋한 향을 내며 하얀 더덕이 하나 둘 바가지에 담겼다.
"야나 니 이거 소통에 부 주고 온나"
"잉? 할머이 껍데기를? 이거 쓰레기잖아. 그리고 이래 서나케이를 저 큰 소한테 준다고"
"서나케이여도 이게 소한테는 보약이여. 부 주믄 다 주 무. 어여 부 주고 와"
할머니 말대로 엄마소는 한 움큼도 안 되는 더덕 껍질을 콧바람을 훅훅 불며 혀로 날름날름 핥아 우적우적 씹어 먹었고, 그날 저녁 나도 고추장에 찍은 더덕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니들 다 한 봉다리씩 쌌으니 집에 가서 까먹어라"
김장김치 공수를 위해 들른 친정행에 엄마가 묵직한 봉지를 하나 건네셨다.
"엄마 뭔데?"
"더덕이여. 내가 까서 줄라 했는데 바빠서 못 깠어"
"엄마 안 깐걸 주니 가져가는 거야. 깐 거 줬음 안 가져가. 그라니 담엔 우리 줄 생각 마시고 아빠랑 드시"
"이 많은걸 뭔 수로 다 먹어"
엄마가 웃으며 눈을 흘기셨다.
집에 돌아와 남편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더덕을 깠다.
더덕을 까다 보니 어릴 적 할머니 앞에서 찐득찐득한 진액이 나오는 더덕이 성가셔서 도라지만 까려고 했던 나의 모습도 떠오르고, 달짝지근 향내 나는 더덕을 쌈장에 푹푹 찍어 먹던 날도 떠올랐다. 그리고 한 바가지나 되는 더덕 껍질을 쓰레기봉투로 직행시켜야 하니 괜히 보약을 버리는 것 같아 아까운 생각도 들었다.
한 바가지 수북한 더덕을 보며 뿌듯한 밤. 뚝 뚝 썰어 고추장에 찍어 먹자고 남편에게 말하니 자기는 홍두깨로 살살살 때려 얇게 펴 고추장 양념을 바른 구이를 해 달라 한다. 그렇담 이 밤 몽둥이 질은 할 수 없고 주말로 미뤄야겠다. 이번 주말엔 현관문 밖까지 더덕구이 향이 폴폴 풍기겠지? 갑자기 숨은 보물찾기 하러 눈 녹은 산에 가고 싶어졌다. 곡괭이 옆에 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