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는 맛
"니 저 부뚜막에 있는 바굼치 들고 온네이"
"할머이 배추로 뭐 할라고?"
"뭐 하긴 배차꾹 끼릴라 그라지"
"배춧국 맛없는데"
"맛이 읍긴. 무 보고 말해. 더 달래지나 말고"
할머니는 수탉도 몇 마리 숨을 것 같은 큰 솥에 물을 담고 살아서 움직일 것 같은 큰 메르치를 한주먹 넣고 물이 펄펄 끓을 때까지 기다리셨다.
"솥딴지서 짐이 나나?"
"어 할머이 펄펄 나"
할머니가 냄비 뚜껑을 열자 멸치의 비릿한 냄새가 진동을 했고 나는 잔치국수를 해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나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는 된장을 한 국자 푹 떠서 냄비에 넣고 휘휘 저으셨다.
"니 내 젙에서 요래 바굼치 좀 들고 서 있으래이"
할머니는 소쿠리에서 배춧잎을 꺼내 들고 손으로 뚝뚝 뜯어 냄비에 넣으셨다.
"할머이 왜 칼로 안 썰고 손으로 해?"
"배차꾹은 이래야 맛있어. 그리고 내 없는 새 절대 뚜깽 열지 마래이"
"왜? 뚜껑을 열면 안 돼? 콩나물도 아닌데?"
"낭중에 보믄 알지"
할머니는 찐 마늘과 비료포대에 심겨 있던 파를 잘라 쑹쑹 썰고 뚜껑을 닫은 뒤 그 위에 박으로 만든 나무 박을 엎어 두셨다.
"엄마 뭐 해?"
"배춧국 끓일라고"
"나 배춧국 싫은데"
"일단 잡솨봐 잡솨보고 말해"
나는 국에 빠진 멸치를 싫어하는 남편 덕분에 손쉬운 마법의 알약 두 알을 넣고 배추를 손으로 죽죽 찢어 넣었다.
"엄마 왜 손으로 해?"
"배춧국은 본디 손으로 찢어야 맛이 살아나"
"설마 귀찮아서 핑계 대는 건 아니지?"
"뭐래, 나름 족보 있는 외갓집 비법이야"
"알겠어. 우리 엄마니깐 믿어줄게. 근데 엄마 피곤하다며 아침에 하지 왜 밤에 하느라 그래?"
"너 모르지? 배춧국은 끓였다 한 번 식혀서 데워 먹으면 훨씬 더 맛있어져"
어젯밤 끓여 놓은 배춧국 덕분에 아침에 여유 있게 일어나 아침 준비를 했다. 뿌듯한 맘으로 뚜껑을 여니 구수한 된장 냄새와 배춧국 특유의 향. 본디 배춧국을 좋아하는 남편은 물론 맛을 걱정하던 작은 아이와 본디 채소 국을 즐기지 않는 큰 아이까지 한 그릇씩 뚝딱 비웠다.
할머니에게서 엄마에게, 그리고 내게 전해진 배춧국 비법. 듣고 보면 시시하기도 하고 비법이라 생각하면 또 비법 같은 절대 뚜껑을 열지 않는 일. 채소와 할머니의 손맛이 찐하게 어우러져 나온 그 진한 맛에 밥을 말아 젓가락으로 총각무를 푹 찔러 검처럼 들고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밥상에 빙 둘러앉아있던 어린 우리들의 모습, 막냇동생보다도 젊었던 부모님의 모습이 그려져 코 끝이 시큰해졌다.
또 한 해가 흘러가고 있고
또 한 해가 다가오고 있다.
나의 죽음과 하루 더 가까워지는 것은 그리 억울하지 않으나 부모님과의 이별이 하루 더 가까워지는 내일이라 생각하면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 너무 슬픈 밤이다. 푸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