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불러오는 감자밭
"너보세옹"
"여보십시오"
"저녁은 드셨어용?"
"아직 안 먹었습니다."
"엥? 시간이 이래 늦었는데 왜 여지껏 안 드시고? 아빠 뭐 바쁜 일 하싰어?"
"감자 놀라고 감자씨 다 따고 소 밥 주고 인제 막 드오는 길이여"
항상 나의 장난을 다 받아주시는 아부지에게 코맹맹이 소리를 내던 나는 어둠은 진즉에 찾아왔건만 아직도 식 전이라는 대답에 장난을 멈췄다.
시골의 3월은 바쁘다.
마늘밭 구멍도 뚫어줘야 하고 하우스 안에서 자라는 고추모를 비롯해 온갖 모종들을 길러내야 하고 또 감자도 심어야 한다. 겨울 내내 코하고 멍석을 덮고 겨울잠을 자던 감자는 어쩔 수 없이 잠에서 깨야했는데 감자 수확이 많은 우리 집은 더 바쁠 수밖에 없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농사일을 점점 줄여가셔야 하는 시절이 왔음은 분명한데 로컬푸드서 농사지신 농작물들이 하나 둘 팔려 나가는 재미에 푹 빠지신 부모님은 절대 일을 줄일 생각을 하지 않고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아니 더 바빠지셨다.
그 효도 작물 감자를 심었다 들은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또 일 년이 지났다니! 어떻게 주변의 모든 것들은 다 바쁘게 변해가는데 나만 이렇게 변함없이 고인 물처럼 머물고 있는 것인지. 이것도 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숙제다.
"니 샘에서 감재 까까 논거 한 양재기 퍼 오래이"
할머니 심부름에 수돗가에 가니 작은 감자알들이 껍질을 벗고 물이 가득 담긴 다라 안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 감자들은 감자씨를 만들고 남은 것들인데 할머니는 싹이 난 감자들을 알뜰하게 손질해 껍질은 엄마소랑 토끼네 가족에게 주고 노란 알맹이는 담가 두셨다. 이제 이 감자알은 하얗고 빨갛게 볶아져 우리의 밥상과 도시락 반찬으로 둔갑할 텐데 해마다 3월 감자씨 파종이 끝난 뒤 감자 반찬이 밥상에서 완전 자취를 감추기까진 꽤 긴 시간이 흘렀다.
"할머이 이만큼이믄 돼?"
"그거 인내 주고 반 바가지 더 퍼 온네이"
"자 여기. 근데 이거 뭐 해 묵을 건데?"
"밥에도 느코 감재뽀끼 할라카지"
"앗싸 또 감자뽀끼 먹겠네"
"주대이 짧아서 먹지도 않는기"
할머니가 잔소리를 하실만한 것이 내가 기다리는 건 나는 감자볶이가 아니라 볶고 난 빈 프라이팬이었는데 식구들은 빈 프라이팬에 뜨거운 밥만 넣고 비벼 먹는 내게 무슨 맛으로 먹는 거냐며 모두 의아해했다.
시간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빈 프라이팬을 좋아한다. 쓱쓱 비벼 먹는 나의 식성을 보며 남편은 전생이 있다면 분명히 나는 바가지 들고 다니며 밥을 먹는 사람이었을 거라 놀리고 나는 칼을 휘두르는 직업이었을지도 모른다며 조심하라 하고 밥을 비빈다.
올해도 감자 파종이 끝났다.
할머니가 감자씨를 따던 자리는 휑하니 비어 있지만 할머니만큼 나이가 드신 부모님이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이 좋은 봄날 감자씨 따느라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감자씨 파종하느라 손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며칠을 고생하시며 큰 숙제를 끝내신 부모님께 보양식이라도 보내 드려야겠다. 그리고 곧 싹이 돋고 파란 입이 수북이 돋고 작고 흰 꽃이 가득 필 감자밭을 기대해 본다. 2026년의 진짜 봄을 불러온 감자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