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길목
"언니야 나 내일 집에 간다"
동생에게 온 연락
"집에 간다고? 좋겠다. 나는 형부도 출장이고 토요일엔 시험이 있어서 못 가"
설에 다녀오고 못 갔으니 아쉬웠다.
"이모야 냅다 밟지 말고 살살 잘 댕기와"
"밟긴, 애 태우고 가서 그러지도 못해"
금요일 오후 친정에 도착한 동생은 간단히 근황을 카톡으로 전해 왔다.
[오늘 일꾼 얻어 마늘밭 구멍 뚫음. 집이 난리도 아님. 뭐부터 치워야 할지]
이 짧은 문장이 전해 주는 선명한 광경. 분명 부엌엔 산더미 같은 설거지 거리와 식탁과 바닥까지 점령했을 갖가지 크기의 냄비들, 그리고 꽈배기의 설탕처럼 뿌려져 있을 거실 바닥에 흙먼지가 떠올랐다.
학교 다녀오는 길.
하얗게 비닐이 씌워진 넓고 긴 이랑 위로 검은 점 한 개가 보였다. 보나 마나 분명 할머니겠지만 혹시나 하는 맘에 동무들과 빠이빠이를 하고 도랑을 건너 마늘밭으로 갔다.
3월이 되면 마늘밭에 구멍을 뚫느라 온 동네 사람들이 바빠졌다. 조신하게 겨울을 난 작은 마늘 촉은 따땃해진 삼월의 햇살에 기지개를 켜며 쭉쭉 자랐고, 성질 급한 몇몇 녀석은 비닐을 뚫고 나오려 고개를 마구마구 내밀고 있었다. 대대손손 마늘 농사를 지어온 우리 집은 남의 밭을 빌려서까지 엄청나게 심었기에 3월의 마늘밭은 그해의 농사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폴짝폴짝 도랑을 건너 마늘밭으로 가니 잔뜩 웅크린 작은 할머니가 더디지만 부지런히 비닐 구멍을 뚫고 흙을 덮어주고 계셨다.
"할머이"
내가 힘차게 부르자 할머니 고개가 더디게 올라와 나를 바라보셨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오이야 잘 댕기 왔나? 핵교 끝났음 집으로 가지 모 하러 일로 와?"
"할머이가 보이니깐 왔지. 혼자 엄청 마이 했네. 할머이가 마늘밭 다 뚫어서 금방 끝나겠어"
"끝나긴카시 열흘을 매도 다 못 다할 판이여. 이 서나케이 했다고 벌씨부터 손꾸락은 꾸비지도 않고 무릎꼬베이도 을매나 쑤신 지 아주 매하네"
"느므 빨리하지 말고 찬차이 해. 내가 쫌 거들까?"
"아서, 쥐똥구녕 할 줄도 몰르믄서"
쥐자는 빼고 똥구녕 소리만 귀에 꽂힌 내가 메아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크게 웃자 할머니도 따라 웃으며 아주 더디게 허리와 무릎을 펴셨다.
3월의 봄 햇살과 내내 동무를 한 할머니와 부모님의 동행에 하얗게만 보이던 마늘밭은 조금씩 푸른빛이 보이더니 밭을 다 맸을 무렵엔 마늘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자라 더 짙은 푸른빛이 돌았다. 그 긴 여정 속에 진한 봄비도 내리고 다시는 내릴 것 같지 않던 눈이 또 내렸고 은빛 서리도 내렸지만 마늘은 굴하지 않고 쑥쑥 자랐다.
그리고 마늘밭 작업이 다 끝나면 할머닌 여느 때와 같이 다시 산사람이 되셨는데 어느 산 어느 지점에 어떤 나물이 나고 얼마나 자랐을지 기가 막히게 기억하고 다녀오셨다. 마늘밭 작업의 후유증까지 더해져 할머니의 걸음과 다래끼는 쳐지도록 무거웠지만 할머니 기분과 미소만큼은 엄청 날쌔고 가벼워 보였었다.
"잘 댕기 왔나? 마늘밭은 다 맸고?"
"응, 그날 일꾼 얻어 다 끝냈어. 엄마가 품앗이 해논게 있어 일꾼이 많았어. 그리고 나 진짜 청소하느라 죽을 뻔. 지금껏 치운 중에 젤 역대급이었어"
"고생했네. 엄마가 봄 되니 품 팔고 바빠서 집안일까지 신경을 못 쓰시나 봐. 그 성격에 어질러진 거 못 견디실 텐데 이제 진짜 기운이 마이 딸리시나보다"
"내 말이. 엄마가 이제 진짜 늙어가는 게 보이더라. 다리도 손가락도 관절은 더 휘고. 생전 안 하던 말을 해서 나 눈물 참느라 혼났어. 그래도 장여사 성질이랑 목청 하나는 여전해"
동생의 말에 상황이 그려진 나는 웃음이 터졌다. 엄마는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묘한 캐릭터임은 분명하고, 다음엔 일정을 맞춰 보자는 약속과 희귀병 투병 중인 중학교 선배 얘기를 전해 듣고 전화를 끊었다.
3월의 따땃한 햇살이 쏟아진다.
봄이 오는 길목에 마늘밭을 지키던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긴 밭고랑 사이사이로 주전자 물을 나르던 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정말 3월은 매일매일 하교를 하고 토요일에도 학교에 다녀오면 마늘밭이 나의 출근지였었다. 그렇게 매해 할머니와 부모님이 마늘밭을 지키셨던 것 같이 마늘밭도 내 곁을 지켰고 내 몸과 맘까지도 키워냈다.
2026년의 3월 내 곁에 푸른 마늘밭은 당장 볼 수 없지만 대신 해마다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우리 동네 버들이가 봄이 가까이 왔음을 알려주고, 친정집 도랑가 버드나무도 늘어지고 있겠다 생각하니 더 반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작은 점 같던 할머니 등을 떠올리다 든 생각. 이상케도 마늘밭의 푸름이 더해 갈수록 할머니의 작은 등이 점점 더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는데 슬마 봄 햇살이 할머니를 작아지게 만들었을까? 그 봄 햇살이 이젠 부모님 등을 잔뜩 비추고 있는 것 같아 서글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