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의 효자
학교에 가려는데 밭에 갈 채비를 하시던 엄마가 말씀하셨다.
아빠와 엄마는 오늘 우리 집에서 젤 먼 산 넘어 밭에 가시는데, 오가는 길이 먼 관계로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아예 점심밥을 지을 쌀까지 지게에 지고 나서신다. 그 밭 옆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흐르는 작은 개울이 있고, 그 개울에는 가재도 살고 발이 많이 달린 징그런 벌레들도 사는데 엄마는 그 물이 고이도록 바닥을 파고 돌담을 쌓아 모은 물로 쌀을 씻으셨다. 그리곤 큰 돌덩이에 걸쳐 놓은 작은 양은 냄비에 냄비밥을 지으셨는데 그때 타는 솔가지 냄새와 돌멩이 위에서 빨갛게 익어가는 가재의 냄새는 정말 명품 대하가 구워지는 냄새 저리 가라였고, 나는 그 냄비밥이 너무도 먹고 싶었지만 학교에 가야 하니 어쩔 수 없고, 오늘 밤 감기 걸린 막냇동생의 따뜻함을 책임질 연탄불을 지켜야 하는 전령사 지령이 내게 내려진 것이다.
한 시간, 두 시간 수업이 끝날 때마다 연탄불이 꺼지면 어떡하나 자꾸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동네 친구들한테 최대한 빨리 가야 한다고 재촉을 하여 달리다 걷다를 반복하며 집에 도착했고, 숨을 헐떡 거리며 연탄아궁이를 열었다.
"힝 우뜨카지? 꺼질라 하네"
나는 누런색을 내며 죽어가고 있는 연탄불을 보며 이 쪼맨한 불이 까만 연탄에 옮겨 붙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엄마가 했던 것처럼 암만 부채질을 해봐도 빨간불이 살짝 드러났다가 다시 사라지고, 빨간불이 살짝 보였다가 또 사라지고, 그리고 더 이상 빨간불도 보이지 않아 나는 연탄불 앞에 쪼그려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니 거서 뭐 하고 있나?"
나는 볼에 흘러내린 눈물을 팔뚝으로 훔치고
"할머이. 왜 이래 일찍 왔어?"
"다래끼에 약이 있는 줄 알고 갔는데 약이 읍지 모여. 오늘따라 다리고베이가 을매나 아픈지 기어기어 겨우 내려왔네. 근데 닌 와 울고 있나?"
할머니가 신발을 벗어 털며 말씀하셨다.
"할머이 엄마가 연탄불 꺼트리지 말고 잘 갈아노라 했는데 학교 갔다 오니 구녕이 몇 개 밖에 안 살아 있었고 인젠 그것도 다 죽었어"
"어디 보재이"
할머니가 절룩절룩 거리며 다가와 연탄불 아궁이를 들여다보셨다.
"참말로 다 죽었네. 느 애미가 불 꺼트맀다고 아 잡겠구만"
나는 그 말에 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잉 울긴. 눈깔이 커서 그런가? 뭔 눈물이 그래 많은지. 불은 다시 피우믄 되지. 지가 장새 있어?"
할머니가 틀니를 드러내며 웃으셨다.
할머니가 절룩거리며 쇠죽 간에서 부스럭거리시더니 바가지에 솔가지와 강네이통을 한 바가지 퍼 오셨다.
"할머이 그거 뭐 할라고?"
"뭐 하긴 불 피우야지"
할머니는 솔가지를 불 꺼진 연탄 위에 얹고 입으로 후후 바람을 부시자 회색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불이 붙자 그 위에다 작은 강네이 통을 뚝뚝 분질러 솔가지가 바스러지지 않게 살살 올려주셨다. 그러자 작은 강네이통엔 벌레가 빨리 기어 가 듯 빨간 불빛이 후루룩 번져 나가며 하얀 연기를 피워냈고, 조금 더 큰 불이 붙자 할머니는 강네이통을 더 많이 올려두시고 곁에 있던 쓰레받기로 힘 있게 부채질을 해 주시자 타탁 타탁 소리를 내면서 강네이통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조금 더 기다리니 볼품없이 빠짝 말라있던 강네이통이 정열적인 색을 내는 빨간 강네이통으로 바뀌고 있었고, 할머니는 내가 그렇게도 불을 붙이고 싶었던 까만 연탄을 집게로 집어 조심조심 올려 두시곤 아궁이 공기구멍을 다 열어 두셨다.
"니 인자 고매 여서 나가. 연탄 내 마이 맡음 골 아퍼. 바보 된데이"
할머니가 손등으로 콧등을 훔치시며 말씀하셨다.
"할머이 고마워. 연탄불 살려줘서"
"마한 것 쉰소리는"
할머니가 웃으며 절룩절룩 무거운 다리를 끌고 수돗가로 가 아픈 다리를 살살 달래며 씻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가 살린 것은 과연 꺼진 연탄불이었는지 나였는지 사실 좀 의문이긴 하다.
그날 만약 내가 연탄불을 꺼트렸다면 분명 나는 엄마한테 맞았을지도 모른다. 뭐 지금 와서 엄마를 너무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는 건 아닌가? 살짝 미안하기도 하지만 나의 추측이 실현되었을 확률은 거의 99.9%다.
가끔 형제들이 모여 마당에 숯불을 피우는데 토치가 아주 효자중의 효자다. 그렇게 만든 불씨를 야무지게 불멍까지 활용하는데, 지난번 꺼져가는 숯 위에 아부지가 모아 놓으신 강네이통을 갖다 툭툭 얹으니 어린 시절 보았던 그 빨간 강네이통이 재현되어 가슴이 울컥했다. 그때 나의 작은 심장을 뛰게 하고 나를 환호하게 만들었던 강네이통. 진짜 그런 삶의 지혜는 누가 개발한 건지? 그리고 절기의 신비함. 격하게 달궈졌던 2024년의 여름도 입추가 지나고 말복도 지나자 부지런한 밤의 연주자들의 공연과 함께 시작된 가을바람을 느끼며 조상들의 삶의 지혜에, 할머니의 지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내 인생의 소망은 조만간 귀촌 생활을 하는 것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은 더 더 간절하게 들고, 그 공간에 누구나 부담 없이 들러 쉬고 가는 충전소를 만드는 것이 나와 남편의 동일한 소망이기도 하다.
아마 그때가 되면 나도 할머니처럼 강네이통을 들고 동분서주하지 않을까? 그런 상상도 미리 해보고, 지겹다 지겹다 말하면서 그래도 월급날이 되면 입꼬리에 미소가 담겨있는 이 생활을 얼마큼 더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도 해 보고, 이제는 자주 볼 수 없는 까만 연탄도 만나면 반가워 우선 사진부터 찍게 된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강네이 이야기.
입으로도 맛있고 생각으로도 맛있는 강네이. 강네이는 인류 역사를 통 틀어 효자중의 효자임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