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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바꿔 생각해 보니....

by 산들바람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흰 지팡이를 들고 주민센터에 들어선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더듬대니 어떻게 오셨느냐 물었다.


"엊그제 태어난 저희 아이의 출생신고를 하려고 왔습니다!!"


"혼자 오셨나요? 이거 부모님이 아이에 대한 정보를 직접 기재해야 하는데 어쩌죠?"


"대필 서비스는 없습니까?"


"네, 저희는 못 해 드려요... 다른 가족을 데리고 오던지 하셔야 합니다."


"가족이라면 저희 아이들은 모두 미성년자입니다. 아직 열한 살 된 저희 큰아들을 데리고 와야 할까요? 어머님은 암투병 중이시고 아버지는 병간호 중이십니다. 더군다나 지금 12월이고 영하 10도가 넘는데 엊그제 아기를 낳고 산후조리 중에 있는 아내가 이 추운 엄동설한에 출생신고를 하러 나와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리고 활동지원인은 매칭이 되지 않아 아직 구인 중에 있는 상황이고요... 사회복지과에서도 대필을 해 줄 수 없다는 말인가요?"


"네, 이게 한자도 있어야 하고 쓸게 많아요"


"아니 그럼 출생신고를 하러 온 아비 된 사람이 한자를 모르고 왔겠습니까? 아이 이름도 컴퓨터로 음과 뜻을 듣고 찾아 제가 직접 지었고, 출생증명서와 신분증을 다 지참했는데 대필이 왜 안됩니까? 금융거래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음과 뜻 말씀 드리면 어차피 컴퓨터 찾아서 기재하실 거 아닌가요? 어떤 게 문제가 되죠?"


"아~ 그래요? 한자를 찾아서 할 수 있었어요? 영문도 아시나요?"


'지금 이 사람들이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자라는 생각을 갖고 이러나? 장애인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당연히 알고 오지요... 그래서 저 혼자서는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저는 이 부분에 대해 강력하게 민원을 제기하겠습니다. 이게 장애인 차별입니다"


"..... 예, 그럼 저희가 대필을 해 드리겠습니다"


민원을 제기하겠다며 제법 큰 소리를 내자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며 뭐는 되고 뭐는 안된다더니 대필을 해 주겠다고 해서 겨우 출생신고를 마칠 수 있었다.

2015년, 이제 만 9세가 된 12월생 막내가 태어났을 당시 도와줄 인력이 없어 남편이 혼자 출생신고를 하러 주민센터에 방문했다가 겪은 일이다.


'장애인 차별 금지법'(장차법)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정식명칭은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며, 2007년 4월 10일 제정되고, 2008년 4월 11일부터 정식 지정 되었다.

요약하자면 모든 생활영역에서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장애를 이유로 차별받은 사람의 권익을 효과적으로 규제함으로써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 참여와 평등권 실현을 통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이다.(네이버 지식백과)

이 법률에서 말하는 '차별'이라 함은 장애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제한, 배제, 분리, 거부 등의 불리한 일을 당하는 경우, 또는 형식상으로는 그러한 상황을 겪지 않았지만 장애를 고려하지 않은 기준을 적용하는 경우, 정당한 편의 제공을 거부하거나 장애인 차별을 조장하는 광고를 시행, 허용, 조장하는 모든 경우이다.

또한 장애인을 돕기 위한 목적의 대리자, 동행자에 대해 위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경우, 보조견 또는 장애인 보조기구 등의 정당한 사용을 방해하거나 보조견 및 장애인보조기구 등을 대상으로 위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경우 등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 보면 부지기수로 겪는 이 모든 일을 신고하자면 거의 매일 신고만 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이전엔 이러한 법률이 존재하더라도 기관이나 기업에서 장애인을 무시하고 차별하면 우리 신세가 이러니 어쩔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하며 혼자서만 분을 삭이고 눈물을 삼켜야 했지만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점차 변화되고 장애인 스스로도 생각이 변화하며 이러한 행위를 당했을 때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이 많이 달라진 점이다.

일일이 따지고 들면 장차법에 해당되는 일은 참 많다. 시각장애인을 예로 들면 키오스크 음성 안내 서비스가 되지 않는 것, 금융 거래 시 자필 사인을 빌미로 대출을 거부하는 것, 안내견 출입을 막는 행위 등이 대표적인 시각장애인 차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차별 행위를 겪었을 때 조금 별나다 싶어도 권익위원회에 민원을 제기하고 공론화시켰던 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2017년, 평촌에 있는 농협에 활동 지원인과 함께 방문하여 은행대출을 받으려던 시각장애인에게 자필서명을 할 수 없다며 후견인 동행을 요구하는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민법에서는 질병, 장애. 노령이나 그 밖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특정사무 처리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된 사람에 관해 심판을 통해 후견인 개시를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시각장애인이 비록 자필서명을 할 수 없다는 한계는 있지만 의사결정 능력이 없다는 판단을 하여 후견인 동행을 요구한 것이다.

주택마련을 위한 중도금 대출 과정에서도 위와 비슷한 일을 겪는 시각장애인이 꽤 많다.

결국, 불이익을 당한 당사자의 공익소송제기에 대해 권익위가 기자회견을 열고 시위를 하며 금융권이 가졌던 시각장애인에 대한 선입견과 생각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한 결과로 2023년 6월부터 여신업무방법 지침을 개정해 활동지원인 등 대리인 없이 시각장애인 혼자 은행을 방문하더라도 대필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QR코드나 음성안내 URL 등을 제공하여 약관 등의 계약서류를 시각장애인이 직접 음성 안내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단다. 점자로 된 보안카드나 저시력인을 위해 서류제작을 확대하거나 더 나아가 전담 직원 배치를 의무화하자는 데까지 의견이 좁혀지고 있다.

약 7년 전쯤 우리 또한 대출 거부를 당한 기억이 있다. 명분은 자필 서명이 문제인 것인데 배우자인 내가 동행을 해서 남편의 손을 쥐고 함께 사인을 하겠다는데도 대출을 거부했다.

결국 민원을 제기하고 큰 소리를 내자 대출을 허가했고, 시각장애인은 판단 능력과 채무상환 능력이 없을 것이라는 편견이 저변에 깔린 듯한 인상을 주던 담당 직원도 대출 만기일엔 직접 전화를 걸어와 그동안 오해해서 미안했다며 개인적인 전화를 걸어 사과를 하는 일이 있었다.


또한 시각장애인이 가장 많이 당하는 차별 중 하나가 안내견 출입제한이다.

공론화된 사건만 보더라도 2019년 1월 , 경남 김해시 한 식당 직원이 안내견의 출입을 막으며 수백만 원의 과태료 처분을 받았고, 같은 해 3월에도 프랜차이즈 음식점에서 안내견 출입을 거부하며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롯데마트에서도 안내견 훈련을 받는 퍼피워킹견의 출입을 막으며 이슈화된 적도 있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2023년 3월에도 KBS 시각장애인 앵커가 경북 경주의 다이소 매장에서 안내견 출입을 금지당한 사건이 있었다.

언젠가 남편과 바우처 일반 택시를 이용하다 안내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자신도 안내견을 태우면 강아지 때문에 일일이 청소를 하는 것이 번거롭기는 하지만 절대로 눈치를 주거나 하지 않는다 했다. 안내견은 단순한 동물이라는 인식이 아니라 시각장애인의 신체 일부라는 생각을 하신다고 했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다.

일부 매장에서는 과태료 대상인 것을 알지만 수백만 원의 과태료를 지불할지언정 '개는 무조건 안된다'며 거부를 당하는 일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출입을 거부할 때면 눈치가 환한 안내견이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참 애처롭다.


경찰조사를 받을 때도 시각장애인을 고려하지 않는 상황이 생기는 일이 다반사이다.

지난해 3월, 지하철역 인근 도로를 걷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의 우측 사이드미러에 팔이 부딪히는 사건으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 중 피해자 권리에 대한 구두적 설명 없이 묵자 인쇄물을 주었으며 신뢰관계인의 동석 여부도 묻지 않았고 자신의 동의 없이 경찰이 가해자의 보험회사에 피해자인 시각장애인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선거를 할 때는 비교적 안내도 잘 되고 시스템도 잘 갖추어져 있는 듯하다.

물론 동행인이 따라가면 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비시각장애인이 함께 표기하는 투표지 위에 점자 표기된 커버를 씌워 나눠진 칸 안에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와 정당에 도장을 찍는 형식이다.

작년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이곳 투표장에 처음 가게 되었다. 예전 동네에선 내가 함께 들어가는 것에 대해 별다른 제재가 없었는데 이곳에선 웬만하면 남편 혼자 들어가는 것을 원하는 듯했다. 남편을 기표소 안에 세워두고 나오려는데 남편이 도장을 들고 어디가 앞부분인지 몰라 뒤쪽으로 찍으려는 것을 얼른 들어가 여기가 앞이라고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이들도 몰랐을 거다. 이런 디테일한 부분까지 안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키오스크와 비대면 단말기가 급속히 확대되어 가며 시각장애인은 또 한 번 좌절을 느낀다.

음성, 점자 안내 기능이 있는 기기는 전체의 10%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로암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작년 4~6월, 서울 시내 공공, 민간 키오스크 230대를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이 음성지원 서비스가 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시각장애인 200명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을 근거로 5개의 기업을 상대로 인권위 진정 및 법원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장차법에 근거해 장애인 편의제공 의무화 3단계의 기간이 지나며 올해 1월 28일부터는 음성안내가 가능한 키오스크를 구비해야 하지만 실효성이 얼마나 있을지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왜냐면 소상공인, 자영업자가 이미 보급된 키오스크가 아닌 음성 안내 서비스가 가능한 단말기를 새로 구입을 하기엔 비용적 부담이 클 수 있으며 이를 모르는 기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때 벌어지는 금전적, 법적 책임을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에게 모두 떠넘기기보다 국가 및 지자체가 홍보, 기술, 행정, 재정적 지원을 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시스템을 만들 때부터 각 장애인을 염두하여 개발하고 보급할 수 있는 사회적 인식을 갖는다면 더 좋겠다.

시각장애인들도 스스로 물건을 고르고 상품을 구매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키오스크도 문제이지만 집에서 편하게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하려 해도 음성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탓에 보이는 이에게 일일이 검색을 부탁하고 읽어달라고 해야 한다.

결국 2017년, 시각장애인 960명이 롯데와 신세계, 지마켓 등의 유통 업체 3곳을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5년이나 지난 시점에 원고에게 10만 원씩 지급하라는 1심 판결이 났으나 소를 제기한 시각장애인들은 아직도 서비스 개선을 하지 않는 그들을 상대로 항소하여 7년째 법정 다툼이 끝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성분과 유통 기한 등에 대한 것만이라도 음성으로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입장이다.

다행히도 시각장애인이 배달어플을 사용할 때는 음성안내가 가능해 메뉴명과 금액을 듣고 어느 정도의 판단이 가능하다. 음성을 듣고도 판단이 서지 않을 땐 남편의 지인이 전화를 걸어와 묻기도 한다.

어느 날은 '깨씹 치킨'이라 읽는 메뉴가 있었단다. 욕인지 뭔지도 모를 이 메뉴가 도대체 뭔지 몇 번을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아 나에게 메뉴 사진을 보여 주었는데 이미지엔 치킨과 깻잎이 보였고 그것을 활용해 맛을 낸 것으로 추정이 되어 깻잎치킨이라 이야기해 주며 서로 배꼽을 잡고 웃은 기억이 있다. 그러하더라도 시각장애인은 음성 안내를 듣고 최대한 스스로 판단할 수 있기를 원한다.


장애인이 요구하는 것도 많고 까탈스럽다는 생각이 들 수는 있지만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생각해 보자....

내가 만약 걸을 수 없다면.... 내가 만약 말 할 수 없다면.... 내가 만약 볼 수 없다면....

아무도 자신이 원해서 장애인이 된 사람은 없다.

지금 당장이라도 장애 없이 사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영혼이라도 바꾸고 싶을 만큼 간절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테다.

장애인이 편한 시설은 비장애인도 편하다.

장애인이 살기 좋은 세상은 비장애인도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장애인 차별법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지만 그럴 수 없다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만이라도 한다면 장애인으로 세상을 사는 일이 그토록 버겁고 우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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