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1)
어떤 말은 누군가를 단단한 못으로 박아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만듭니다.
또 어떤 말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해주며, 민들레 홀씨처럼 훨훨 날아가게 만들기도 합니다.
쓰레기 작곡가
한 청년 작곡가는 이 한마디에 완전히 바닥으로 내던져진 기분이었습니다.
그가 온 마음을 바쳐 만든 곡을 초연한 다음 날, 유명 신문에서 앞다투어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는 그의 곡을 두고 “이집트에 내려진 재앙과 같다”며 조롱했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피아노에 손가락도 댈 수 없었습니다.
피아노를 보면 어디선가 '쓰레기'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러시아의 음악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evich Rachmaninov)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클래식의 거장’이라 불리는 그에게도 이런 처참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실 라흐마니노프는 그당시 실패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4살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며 이미 ‘실력’을 인정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젊은 날의 열정을 담은 ‘교향곡 1번’을 만들어냅니다. 그는 이 곡에 거의 1년 동안 매일 7시간 이상씩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897년, 교향곡 1번이 초연되며 세상에 공개됩니다. 기대와는 달리, 초연은 엉망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 초연을 담당했던 지휘자가 ‘낮술을 했었다’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정말 지휘자가 음주 상태로 초연을 했는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날의 지휘는 엉망이었고, 연주가들의 화음은 무너져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곡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전달되었을 수 없겠지요.
다소 억울한 상황으로 인해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에 대한 트라우마가 단단히 생겨버렸습니다.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랑하던 연인 나탈리아와의 결혼도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그 후 약 4년간 음악을 놓다시피 했고, 완전한 슬럼프에 빠져버립니다.
햇살이 비친 호수 같았던 그의 눈동자는 점차 진흙처럼 어두워졌습니다. 그런 그를 안타깝게 여긴 가족들은 여러 방면으로 치료자를 찾아보고 데려가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치료자에게도 라흐마니노프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고모를 통해 정신과 의사이면서 최면치료법으로 명성이 높던 ‘니콜라이 달 박사(Dr. Nikolai Dahl)’를 소개받게 됩니다.
라흐마니노프가 ‘달 박사’를 처음 본 날도, 여전히 그의 마음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달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위대한 곡을 쓸 것입니다. 그 곡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겁니다.”
몇 년간 좌절에 빠져있던 라흐마니노프에게 그 말이 들릴 리 없었겠지요. 오히려 ‘나를 조롱하는 건가?’싶은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달 박사의 말은 반복되었습니다.
“당신은 곧 위대한 음악을 만들 거예요.”
1900년 1월부터 시작된 치료는 거의 매일, 수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900년 여름, 그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지난 시간들을 회상합니다.
열정을 다 바쳐 만든 곡. 처참하게 무너졌던 날. 허락받지 못한 결혼..
그는 그 모든 심정을 곡에 하나하나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위대한 곡이 태어나는 그 날을 상상하면서 곡을 만들어나갑니다. 음악을 통해 지난 세월을 치유하듯 그의 서사를 담아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깊은 심연을 담아낸 〈피아노 협주곡 2번: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이 완성됐습니다.
1901년 11월 9일 모스크바의 공연장,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초연하는 날입니다. 라흐마니노프는 결국 트라우마를 딛고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았습니다.
몇 년 만에 공연장에서 다시 건반을 누를 때 그는 얼마나 숨죽였을까요?
곡이 시작되었고, 어둡고 비통한 낮은음부터 시작되어 점차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소리, 조금씩 희망이 차오르며 잔잔하게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음색, 그간의 모든 고통을 치유하듯 곡이 마무리됩니다. 1악장부터 3악장까지 그의 곡은 마치 라흐마니노프의 일대기를 보는 듯 느껴졌습니다.
마지막 음이 사라지며 공연장에는 잠시 정적이 머물렀고, 이내 기립박수로 가득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단숨에 명성을 되찾았고, 최고의 피아노연주가이자 작곡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와 더불어 사랑하는 연인 나탈리야와의 결혼도 드디어 허락받게 되었죠.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헌정합니다. 자신을 진흙탕 속에서 양지로 꺼내준 것에 대한 깊은 고마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의 일화는 심리학계에서도 꽤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믿음의 힘. 바로 ‘피그말리온 효과’를 설명하기 참 좋은 사례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나요?
달 박사의 말처럼 낙관적인 말이 아닌 누군가에게 들었던 비난도 기억날 수 있습니다. “너는 왜 하는게 그 모양이니?” “하여간 네가 그렇지”. 이런 말들은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원래 그런가 보다. 나는 변하지 않을 거야.’라는 내면의 소리로 자리 잡아버립니다.
반복적인 말과 행동의 힘은 참으로 큽니다.
심리학/신경과학에서는 이를 ‘신경가소성’의 원리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신경가소성이란 ‘neuro(신경) + plasticity(변형 가능한 성질)’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바로 우리의 뇌세포가 말랑말랑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뇌세포가 움직인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바로 변화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말한 대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저는 임상심리사로서 정신과 및 신경과에서 많은 환자분들을 만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과정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지켜보았습니다.
무대공포증을 극복하신 분, 뇌졸중으로 잃었던 언어 능력을 회복한 환자, 공황장애를 다스리며 꿈을 이뤄나가신 분 등. ‘기적’이라 불리울 수 있는 그 과정 속에 함께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 연재에서는 제가 그동안 접해왔던 기적같은 변화를 소개하고, '신경가소성과 그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