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를 사냥하는 나라

이런 나라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by 나팔수

약자를 사냥하는 나라 - 이런 나라에는 살고 싶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약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이들에게는 가장 먼저 노리는 “사냥감”처럼 취급된다.

최근 드러난 사건들—지적장애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상납 강요, 농아인협회 간부의 채용 미끼 성폭력, 협회 이사의 반복된 성폭행과 임신·낙태 종용—은 개별 범죄가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벌어졌지만, 충격적일 만큼 비슷한 구조를 공유한다.


이 구조의 첫 번째 층은 취약성의 악용이다. 지능이 낮다는 이유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표현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이유로, 혹은 조직 안에서의 지위가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언제든지 누군가의 사적 욕망과 권력의 실험대 위에 올려질 수 있다.

범죄자들은 늘 그 약점을 먼저 찾아낸다.

저항하지 못할 것, 도망치기 어려울 것,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 세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사냥은 너무나도 손쉽다.


문제는 이 범죄가 일어나는 공간들이 모두 보호를 위해 만든 기관이라는 점이다.

쉼터는 약자를 숨겨주는 곳이어야 하고, 협회는 장애인의 권리를 대변해야 하고, 통역센터는 농인의 언어를 세상에 연결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모든 공간이 오히려 약자를 가두고 지배하는 가장 완벽한 사적 권력의 장으로 변한다. 외부의 눈은 닿지 않고, 내부의 조직은 폐쇄적이며, 인사권은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고, 약자는 구조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제도가, 그 이름 그대로 약자를 사냥하는 캠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문제는 장애인의 영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연예계에서 신인 배우에게 요구되는 성상납, 감독과 기획사가 오디션을 미끼로 성관계를 강요하는 구조,

아이돌 연습생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

이주노동자와 청소노동자에게 비자· 여권을 빌미로 성적 지배를 가하는 일들,

학교·체육계·보육원에서 벌어지는 반복적 성폭력들.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동일한 논리가 작동한다. 약자는 말하지 못하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고, 믿어도 지켜주지 않으며, 지켜주지 않아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잔인한 폭력은 종종 두 번째 폭력, 즉 2차 가해다.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당했다”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의심이다.

“꽃뱀이다”, “문란하다”, “왜 이제 말하냐”, “증거를 대라.” 이 몇 마디의 언어는 피해자를 다시 침묵 속으로 몰아넣고,

가해자는 그 사이에 또 다른 권력을 재건한다. 이 사회의 언어는 약자를 보호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침묵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분노 하나로는 부족하다. 구조를 바꾸기 위한 결단이 필요하다. 보호기관과 협회, 시설, 기획사 등 약자가 밀집하는 공간은 이제 더 이상 ‘자율’을 이유로 외부 감시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독립된 외부 감사가 정기적으로 들여다보고, 인사권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며, 권력을 이용한 성적 착취는 일반 성범죄보다 더 무겁게 처벌해야 한다. 고발이 들어오면 피해자를 먼저 보호하고, 가해자를 즉시 직무에서 분리하는 체계도 필수다. 무엇보다 법과 제도는 약자의 진술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취약성을 감안해 가중 신뢰를 부여해야 한다.


이런 변화가 없다면, 한국 사회의 약자 사냥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보호시설이든 협회든 기획사든, 약자를 둘러싼 모든 공간은 오늘도 또 다른 침묵을 강요하고 있을 것이다.


문명은 약자를 지킬 때 비로소 문명이 된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약자를 사냥하는 이 나라를 우리는 과연 문명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리고 이런 나라에서, 우리는 정말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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