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에게 告하는 희망의 메시지
한국은 망한다 - 13 망국의 조건 1
내부의 적과 외부의 굴종
제8장
내부의 적과 외부의 굴종 – 망국의 조건
"심장을 빌려 쓴 국가는 오래 살지 못한다.“
국가의 심장은 주권이다. 그 심장을 외국의 손에 맡기고도 자주국가라 부르는 것은 기만이다. 전시작전권의 부재는 한국이 여전히 구조적 종속 상태에 있음을 드러낸다. 내부의 부패와 외부의 압력이 결합할 때, 국가는 쉽게 무너진다. 이 장은 그 치명적 조건들을 하나씩 드러낸다.
제1절 식민지 근성, 뉴라이트의 귀환
해방은 되었지만, 해방된 것이 아니었다.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은 광장의 함성 속에서 시작되었지만, 골목과 권력의 이면에서는 해방되지 못한 자들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해방 이후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존했고, 다시금 자라났다. 식민지 근성은 그렇게 살아남아 한 세대, 두 세대를 건너 ‘뉴라이트’라는 이름의 독버섯으로 다시 피어오르고 있다.
뉴라이트는 단지 하나의 정치적 성향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 청산 실패의 유령이 만들어낸 괴물이다.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한 역사, 미군정 아래에서 기회주의적으로 살아남은 식민지 협력자들, 그리고 그들 중 일부가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선 대한민국의 정치사.
그 흐름의 정점에서 오늘날 뉴라이트는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미명 아래 ‘역사 왜곡의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리·박 스쿨’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이 교육 프로그램은 역사 교육을 신앙화하고, 권력을 정당화하며, 과거의 폭정을 ‘경제 성장’이라는 프레임으로 미화한다. 학생들에게 주입되는 것은 비판적 사고가 아니라 충성의 감정이며, 역사적 책임이 아니라 역사적 망각이다.
이들의 논리는 단순하다. “과거가 어쨌든 지금 잘 살면 됐다.” “북한보다 낫지 않느냐.” “일제 강점기 때도 질서가 있었다.”
이런 말들은 단지 망언이 아니라, 집단 기억의 퇴행이다.
뉴라이트 담론의 저변에는 여전히 “식민지적 자의식”, 즉 “우리는 스스로 근대화를 이룰 수 없었고, 외세에 의해 근대화되었다”는 자기 비하적 인식이 깔려 있다. 그것은 식민지 근대를 정당화하고, 스스로의 존엄을 스스로 훼손하는 비문명적 사고의 회귀다.
문제는 이런 담론이 일부 극우 세력의 유튜브 채널이나 SNS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치권, 교육계, 언론계 심지어 종교계까지도 이러한 왜곡된 역사 인식에 편승하고 있으며, 그것이 국가 공동체의 근간을 좀먹고 있다.
과거를 정당화하는 순간, 미래는 없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 방치한 사회는, 결국 그 과거의 망령에 의해 다시 삼켜진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직면한 여러 위기, 사회 갈등, 공동체 해체, 이념적 극단화의 배경에는 바로 이 ‘식민지 근성’의 귀환이라는 구조적 병리가 놓여 있다.
제2절 사대주의의 유산 – 고개 숙인 민족의 그림자
사대주의는 단지 역사 속 봉건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적 식민지화’, 그 중심에도 사대주의가 살아 숨 쉰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에, 해방 이후에는 미국에. 한국은 항상 누군가의 힘에 기대어 살아남는 법을 배워왔다. 그 결과, ‘자주’와 ‘주권’은 말뿐이고, 실제로는 의존과 굴종의 습성이 몸에 밴 국가가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주한미군 문제이다.
경기도 평택에 자리한 캠프 험프리스(Camp Humphreys)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미군 기지다. 전체 부지는 약 3,500 에이커로 미국의 워싱턴 D.C. 중심부 면적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 건설에 한국이 쏟아부은 예산은 약 110억 달러로 한국이 90% 이상(약 11조 원)을 부담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야말로 특급 호텔급 시설을 미군에게 바치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방위비 분담금’을 5배, 10배 인상하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 앞에서 정부는 제대로 된 반론조차 하지 못하고 ‘한미동맹 강화’라는 모호한 수사만을 되풀이한다.
문제는 이런 외교적 불균형이 시민사회의 내면까지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미군이 철수하면 우리는 망한다’ ‘미국 없이는 한반도 안보가 불가능하다’ 이러한 주체 없는 공포감은 국민 스스로가 자국의 자존을 포기하게 만든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인식이 정치적 이익과 연결된 ‘자발적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조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보수 언론, 극우 유튜버, 전직 군인 집단 등은 성조기를 들고 광화문 광장을 점령하고, “트럼프가 와서 대한민국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식민지 백성처럼 자신을 낮추고, 미국을 ‘구원자’로 여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애국자라 부른다.
‘우리는 주인인가, 하인인가?’
이 질문은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존엄과 정책 결정의 주체성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다. 자주 외교를 말하면서, 미국산 무기를 무비판적으로 도입하고, 경제 원조를 받던 시절의 심리를 21세기까지 끌고 가는 한, 한국은 결코 ‘독립된 문명국’이 될 수 없다. 사대주의는 굴종을 낳고, 굴종은 무능을 정당화하며, 그 무능은 다시 국민을 향한 통치의 폭력으로 되돌아온다.
한 나라의 몰락은 전쟁이나 경제 파탄만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 문화를 부끄러워하고, 타자의 이름을 빌려 권위를 얻으려 할 때 이미 그 나라는 정신적으로 식민지화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벌이는 일부 사업들은 실로 “망할 짓”의 교과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인천 송도의 외국 대학 유치 사업이다. 학생 수는 줄고, 국내 대학조차 통폐합 논의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미국·유럽 대학의 분교를 세금으로 끌어들이는 발상은 전형적인 문화 사대주의이자 교육적 자해행위다.
현실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외국 대학 분교는 정원 미달, 낮은 경쟁력, 교육 품질 논란으로 국제학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껍데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모든 게 합리화된다. 이것이 바로 망국의 징후다.
부산시가 추진한 퐁피두 미술관 분관 유치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프랑스의 문화 브랜드를 한국 땅에 옮겨오는 것을 문화 수준의 척도로 삼는 기이한 발상.
그에 필요한 운영비와 건립비는 수천억 원에 달하고, 그 모든 재원은 결국 시민의 세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지역 예술가들의 생태계를 살리는 데 쓸 예산은 없고, ‘퐁피두’라는 이름 하나에 목을 맨다.
예산은 해외로, 허세는 지역 정치인의 업적으로, 문화는 타자의 이름에 종속된다. 이러한 정책은 단지 일회성 실수가 아니다. 이 나라가 가진 구조적 문화 사대주의와 자기 불신의 뿌리 깊은 습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청와대 개방 후 아무런 문화적 비전 없이 ‘산책 코스’로 방치된 공간, 외국 기업 유치를 위해 국내 기업보다 더 많은 세제 혜택을 퍼주는 정책, 한류 붐을 외국 플랫폼(넷플릭스, 유튜브)에만 얹혀 확장하려는 미디어 전략까지. 이 모든 것은 대한민국이 스스로의 주체성을 상실한 채, 외부의 권위에 목매는 사회임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 같은 현상이 단순한 ‘관성’이나 ‘무능’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식민의 후유증, 비판 없는 추종, 정체성에 대한 깊은 혼란이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요소들이,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냉정한 진단의 근거가 된다.
진정한 문화 강국은 남의 이름을 빌려 오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것을 사랑하고, 스스로의 이름으로 그것을 빛내는 나라만이 문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 한국은 아직 그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과거 제국에 고개 숙였던 사대주의는 오늘날에도 다른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이제는 외세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과거의 신화를 붙잡고 향수에 젖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향수는 결코 미래를 열어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위기에 직면하면 종종 과거를 소환한다. 그들에게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 ‘이승만의 대미 외교’가 오늘의 난국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신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신화는 실제의 역사보다 훨씬 단순화되고 미화된 기억일 뿐이다. 값싼 노동력과 농촌의 희생, 외세 의존 속에서 이룩된 개발 신화를 오늘날의 해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안도감을 얻으려는 자기 위안일 뿐이다.
문제는 향수가 현실을 가린다는 데 있다.
과거의 향수에 젖는 순간, 우리는 눈앞의 위기를 보지 못한다. 인구 절벽, 기후 재난, 교육 붕괴, 정치 타락이라는 구조적 난제를 풀 새로운 비전은 외면한 채, “그때가 좋았다”는 말만 반복한다. 그것은 마치 무너져 내리는 집 안에서 한때 화려했던 장식품을 붙잡고 감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향수는 달콤하지만 위험한 독이다.
독일에서 나치가 과거 제국의 영광을 내세워 민중을 속였듯, 한국에서도 “옛날이 좋았다”는 환상은 현재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하고, 더 나아가 미래를 준비할 힘마저 빼앗는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방식으로 열어가야 한다. 과거의 신화를 되풀이하는 사회는 결국 미래를 잃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