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망한다 - 26

한국인들에게 告하는 희망의 메시지

by 나팔수

한국은 망한다 - 26


제2부

망하지 않을 이유 - 한국의 저력


제1장

역사적 저항의 DNA


제1절 동학, 불붙은 민초의 혼 – 피의 언덕에서 피어난 존엄


대한민국은 결코 순종으로 생존한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저항으로 숨을 이어왔고, 민초들의 절규와 투쟁이야말로 이 땅을 일으켜 세운 진짜 근간이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다.

조선말, 내부의 부패와 외세의 침탈 사이에서 백성들은 말 그대로 짓밟히고 있었다.

탐관오리의 수탈, 일제의 침투, 불공정한 계급 질서.

이 삼중고 속에서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품은 동학은 단순한 종교운동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되찾기 위한 민중 봉기로 타올랐다.


“우리는 왜놈을 몰아내고 탐관오리를 베어버릴 것이다.

이 땅을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로 바꿀 것이다.”

이들은 무기가 없었다.

그래서 농기구를 들었다.

이들은 전략이 없었다.

그래서 하늘을 믿었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등 수많은 지도자들이 백성과 함께 싸우며, 전주성 점령, 폐정개혁안 12조 요구 등 구체적인 정치 개혁안을 내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에 의해 진압당했고, 수만 명의 동학군은 죽임을 당하거나 산으로 내몰렸다.


전봉준은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혁명의 꿈은 처참히 꺾였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저항은 가능하다”는 역사적 선언이었다.

그리고 이후의 의병운동, 3.1 운동, 독립운동, 심지어 1980년 광주의 저항까지 동학의 피는 이 땅의 모든 저항 정신의 기원이 되었다.


사람들은 종종 “한국인은 위기에 강하다”라고 말한다.

전쟁과 식민지배, IMF 위기와 같은 수많은 국난을 버텨낸 역사를 두고 흔히 하는 이야기다.

얼핏 들으면 자랑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말은 고난을 미화하고 상처를 덮어버리는 억지에 가깝다.

한국이 겪은 위기는 선택이 아니라 강요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중이 죽어갔으며, 남은 사람들은 겨우 버티며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것을 두고 “강하다”라고 포장하는 것은 진실을 호도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이 말은 종종 권력자들의 언어로 쓰였다.

“고난을 기회로”라는 구호는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할 때 등장했고, “위기에 강하다”는 신화는 잘못된 정책과 체제의 무능을 가려주는 방패막이가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진짜 위기를 넘어선 힘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결코 어떤 민족적 DNA나 본질적 강인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한국이 무너질 듯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길을 열어온 것은 민중의 연대와 저항이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3·1 운동에서, 광주민주화운동과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고비마다 희생을 감내하고 길을 만든 것은 언제나 ‘위기에 강한 민족성’이 아니라 서로를 붙잡아 일으켜 세운 사람들의 힘이었다.

우리는 이제 “위기에 강하다”는 자기 위안의 말 대신, 역사적 저항의 DNA라는 더 진실한 언어로 우리 민중의 힘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 한국이 망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


제2절 의병, 꺾이지 않은 산천의 깃발 – 들불처럼 번진 민초의 분노


을미사변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명성황후(민비)가 일본 낭인(浪人)들과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주도 아래 경복궁 내 건청궁에서 시해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조선 민중의 대규모 반일 감정을 폭발시켰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을 촉발하였다.


단발령(斷髮令)은 1895년 11월 갑오개혁에 이어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단발을 강제한 조치였다. 이로써 조선인들에게는 심각한 정체성의 모욕으로 받아들여져 을미의병의 동기를 부여한 사건이다.


조선의 백성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된 이후, 민심은 들끓었고 나라를 위해 일어나 싸우겠다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것이 의병이었다.


이들은 정규군도 아니고, 훈련받은 병사도 아니었다.

농부였고, 유생이었고, 장사꾼이었으며, 마을의 어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들고일어난 순간, 그들은 모두 하나의 이름이 되었다: 의병.


의병은 1895년부터 1910년 경술국치 직전까지 여러 차례의 물결로 일어났다.

1차 의병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한 자발적 봉기였고,

2차 의병은 을사늑약(1905)에 반발한 항일 무장운동이었다.

3차 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1907)와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전국적인 무장투쟁으로 확산되었다.


그들은 압도적 무장력을 가진 일본군에 맞섰다.

하지만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죽음은 더 많은 의병을 불러냈고, 한 알의 밀알처럼 쓰러져 다시 민중의 불꽃으로 되살아났다.


일제는 이들을 ‘폭도’라 부르며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하지만 의병은 폭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나라를 팔아넘긴 자들에 맞선 마지막 양심이었고,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외치는 민중의 목소리였다.


그 정신은 광복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광복군, 독립군, 그리고 민주화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로 그 깃발은 전해졌다.

의병은 패배하지 않았다.

그들의 저항은 죽지 않았고, 오히려 민중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깃발로 펄럭이고 있다.


제3절 3.1 운동, 깨어난 민족의 함성 – 만세로 울린 해방의 서곡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은 단지 독립을 요구한 외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긴 침묵을 깨뜨린 민족의 각성이었고, 억압받은 존재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기 위한 처절한 외침이었다.

이 날은, 그 이전의 어느 날보다 더 뜨겁게 ‘조선 민중의 의지’가 타올랐던 날이었다.


1. 제국의 거짓 평화, 그리고 분노의 씨앗


일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열강 앞에서 ‘조선을 잘 통치하고 있다’는 외교적 선전을 일삼고 있었다.

표면상으론 ‘문화정치’니 ‘자치 허용’이니 하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헌병통치와 사상 검열, 토지 수탈, 언론 통제, 종교 탄압, 창씨개명 강요 등으로 조선을 옥죄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이 제창되었고, 이를 계기로 조선 지식인과 종교계 인사들이 독립 선언서를 기획했다.

그러나 그 불꽃은 곧 전국 곳곳으로 번졌고, 중심엔 언제나 민중이 있었다.


2. 유관순, 이름 없는 수많은 민초들


역사의 장면에서 가장 선명하게 기억되는 인물, 유관순 열사.

그녀는 불과 열여섯 살에 독립운동에 나섰고, 아우내 장터에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 투옥되었다.

감옥에서도 외침을 멈추지 않아 모진 고문 끝에 순국했다.

하지만 그녀만이 아니었다.

만세 시위는 서울, 평양, 대구, 전주, 목포, 진주, 간도 등 전국 1,500개 이상의 지역에서 2백만 명 이상이 참여한 민중의 해방제였다.

말 그대로 조선 전역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3. 제암리 학살과 일제의 민낯


독립운동의 확산에 당황한 일본은 무력 진압으로 대응했다.

그중 가장 끔찍한 장면 중 하나는 경기도 화성 제암리에서 벌어졌다.

1919년 4월, 일본 헌병대는 만세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졌던 제암리 마을의 주민들을 교회로 유인한 뒤,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질렀다.

일본판 홀로코스트였다.

어른, 아이, 노인을 가리지 않고 무참히 불태워 죽였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이를 목격하고 국제사회에 고발하면서, 일제의 만행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4. 임시정부의 수립, 항일 독립운동의 중추로


3.1 운동은 비록 직접적으로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에너지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수립(1919.4.11.)이라는 정치적 결과로 이어졌다.

임시정부는 이후 독립운동의 중심이자 상징이 되었고,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신적 뿌리로 기능했다.


5. '비폭력'이라는 위대한 선택


31운동이 위대한 이유는 단지 그 규모나 확산 속도 때문만이 아니다.

민중들이 끝까지 ‘비폭력’이라는 태도를 지켰다는 점에서, 이 운동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이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6. 역사의 함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31운동의 정신은 단지 과거의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독재 정권을 향한 419혁명, 518광주항쟁, 6월 항쟁, 촛불혁명 등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모든 분수령마다 그 정신은 살아 숨 쉬고 있다.

역사는 말한다.

한민족은 무릎 꿇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그리고 스스로 일어서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대한독립 만세!”는 단지 나라를 되찾자는 외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을 되찾고자 했던, 조선 민중의 영혼이 울부짖은 절규였다.

그리고 그 울림은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제4절 광주, 핏빛 5월의 진혼곡 – 총칼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1980년 5월, 광주는 도시가 아니었다.

그곳은 인간의 존엄이 총칼에 의해 유린당한 자리였고, 동시에 그 존엄을 끝끝내 지켜내려는 민중의 혼이 불탔던 성소였다.

자유를 갈망하던 시민들은 계엄령과 군홧발, 발포 명령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몸으로 민주주의를 했다.


1. 침묵의 공포를 찢어낸 외침


1980년 5월 18일, 전두환 일당이 주도한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는 단순한 정치적 쿠데타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국민을 군대로 진압하려 한 폭압적 국가 범죄였다.

그 시작은 전남대학교에서였고, 곧 광주 전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민들은 군인의 총구 앞에 서서 외쳤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우리는 국민이다!”

하지만 그 외침은 M16의 탄환에 찢기고, 헬기 사격에 산산조각 났다.

계엄군은 광주를 전쟁터로 만들었고, 민간인을 향해 발포 명령을 내리는 국가는 더 이상 국가라 부를 수 없었다.


2.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비범한 혁명’


광주의 시민들은 무장을 시작했지만, 그것은 공격이 아닌 방어였다.

수많은 증언과 기록은 이를 뚜렷이 말해준다.

시민군은 질서를 유지했고, 부상자를 돌봤으며, 약탈은커녕 가게 문을 지켰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광주는 ‘폭도’가 아니라, ‘시민’이었다.

그들은 대한민국 헌법이 말한 주권자의 본모습이었다.

“광주는 패배하지 않았다. 단지 학살당했을 뿐이다.”

— 고(故) 백기완 선생


3. 기억을 지우려는 자들과 싸워온 40년


광주는 살아남았다.

신군부는 진실을 덮으려 했고, 수많은 언론은 침묵하거나 조작되었다.

하지만 그날의 총성과 울음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서 꺼지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의 불씨가 되었고,

2002년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 ‘화려한 휴가’는 김상경, 안성기 주연의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을 그림 영화로 700만 명 이상이 관람하며 한국 현대사 영화 중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로 다시 살아났으며, 2017년 촛불광장에서는 그 정신이 다시 촛불의 불꽃으로 살아났다.

역사는 증명했다.

광주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임을.


제5절 촛불, 민주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 2016 겨울, 광장의 기적


대한민국의 겨울은 차갑지만, 그 해의 겨울은 달랐다.

2016년 10월부터 2017년 봄까지, 전국의 광장에는 수백만 개의 촛불이 어둠을 밝혀 민주주의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국민은 더 이상 권력의 종속변수가 아니었다.

국민이 직접 권력을 심판하고, 국민이 스스로 헌정을 되살렸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그 주인공은 정치권도, 재벌도 아닌 ‘광장의 시민들’이었다.


1. ‘정치’는 사라졌지만 ‘시민’은 살아 있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국민은 단지 분노만 하지 않았다.

그 분노를 광장으로 끌어냈고, 연대했고, 끝내 민주주의를 복원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정치의 사망”이라 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정치의 주체를 국민으로 되돌려놓는 부활이었다.


1,700만 명 이상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촛불 집회.

전국 134개 도시, 23차례의 대규모 집회.

폭력과 약탈 없이, 질서 정연하게 진행된 시민 행동.

이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진리를 보여준다.

대한민국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2. 기적은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탄핵은 ‘운 좋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 배후에는 지난 100년을 이어온 저항의 계보가 있었다.

동학에서 시작된 민중의 깨어남

의병의 피와 땀으로 지켜낸 자주정신

3.1 운동과 4.19 혁명,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의 고귀한 희생

그리고 그 모든 걸 안고 일어선 촛불 시민


“이 촛불은 100년 전 항쟁의 불씨요,

오늘날 민주주의의 성화이며,

미래세대에게 건네줄 자유의 횃불이다.”

— 어느 시민 발언 중에서


촛불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것은 이제껏 잊힌 이름들을 다시 불러내는 의식이며,

또다시 역사의 어둠이 덮쳐올 때 우리가 꺼내야 할 도끼와 횃불이다.


3. 그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면


촛불이 꺼진 자리에 다시 독재가 움트지 않도록,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왜 우리는 또다시 권력을 잘못 위임했는가?’

‘진정한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라 시민의 감시와 참여임을 잊고 있는 건 아닌가?’

‘광장은 비워졌지만, 그 정신은 어디에 남아 있는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다시 동학을 떠올려야 하고, 의병의 피를 기억해야 하며,

광주의 희생을 가슴에 새기고, 촛불을 두 손으로 지켜야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그 반복을 정의로운 순환으로 바꿔낸 민중의 투쟁이 존재했기에,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민주를 말할 수 있다.


‘역사적 저항의 DNA’는 유전되었다.

다음 세대가 다시 깨어날 수 있도록,

이제 우리는 그 정신을 기록하고, 전승하고, 행동으로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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