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에게 告하는 희망의 메시지
한국은 망한다 - 30
제2부
망하지 않을 이유 - 한국의 저력
제5장
청년 세대의 전환 - 체념을 넘어 실천으로
제1절 절망의 세대 – 기회의 사다리는 끊겼다
한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적어도 희망의 문을 열어주는 주문처럼 들렸다.
부모 세대가 피땀 흘려 일군 산업화와 민주화의 경험은, 자식 세대에게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약속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이 나라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오히려 그 가능성을 무너뜨리는 구조로 청년들을 밀어 넣고 있다.
“노오력”이라는 조롱이 유행이 되었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말이 일상이 되었다.
이 짧은 유행어 안에는 한 세대 전체의 절망이 스며 있다.
취업은 좁은 문이 되었고, 집 한 채는 평생의 꿈이 아니라 포기해야 할 신기루가 되어버렸다.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다운 삶—이 모든 것이 “N포”로 줄여지는 포기 목록에 올라 있다.
한국의 청년들은 단순히 실패한 것이 아니라, 기회 자체를 빼앗긴 세대다.
통계는 이 절망을 수치로 증명한다.
청년 체감 실업률은 공식 수치보다 훨씬 높으며, 안정적인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 인턴의 악순환 속에서 많은 청년들은 이력서를 끝없이 쓰고, 꿈을 접고, 자존감을 잃는다.
대학 졸업장은 더 이상 티켓이 아니다.
오히려 빚더미에 올라앉는 출발선이 되었을 뿐이다.
그 와중에도 언론과 정치권은 청년을 향해 “분발하라”, “도전하라”, “창의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청년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 사회는 청년의 도전이 실패하더라도 책임지지 않으며, 그 실패를 개인의 나약함으로 돌릴 뿐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만들어진 청년 없는 사회는 생동감이 없다.
창의도, 다양성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회는 특정 계층에게만 주어지고, 그 계층은 점점 더 견고한 성(城)을 쌓아간다.
기회의 사다리는 이미 사라졌고, 남은 건 벽뿐이다.
누구도 오를 수 없는 그 벽 앞에서, 청년들은 묻는다.
“왜 우리는 포기해야 하는가?”
“이 나라는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할 수 있는가?”
청년의 목소리를 외면한 문명은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오히려 청년 세대의 절망은, 이 문명이 이미 내부에서부터 썩고 있다는 경고음이다.
제2절 불안정한 미래, 그러나 다른 상상
‘아프니까 청춘이다.’
한때 유행했던 이 말은 이제 조롱처럼 들린다.
청춘이 아픈 것이 아니라, 사회가 청춘을 아프게 만든 것이다.
고용은 불안정하고, 집값은 하늘을 찌르며, 정치는 희망을 주지 못한다.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는 이제 ‘오포’와 ‘칠포’를 넘어 ‘N포세대’로 불린다. 이 사회는 청년에게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포기한 것은 절망이 아니라 ‘기성의 질서’이다.
기성세대가 말하는 ‘성공’은 더 이상 청년에게 통하지 않는다.
대기업 입사, 내 집 마련, 결혼과 육아, 은퇴 후 연금… 이 공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경쟁은 과열됐고, 보상은 불확실해졌다.
희망은 멀고, 상실감은 가깝다.
더구나 기성세대는 이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한다.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어.’ ‘한탕만 노려.’ ‘정치를 몰라.’
그런 말들은 마치 누군가의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다.
청년들은 단지 게으른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가 붕괴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년들은 ‘다른 상상’을 시작했다.
정규직이 아니라도 좋다. 안정이 아닌 자유를 선택한다.
도시는 좁고 비싸지만, 지방은 넓고 가능성이 있다.
돈보다 의미 있는 일을 찾고, 성공보다는 지속 가능한 삶을 꿈꾼다.
그들은 이제 ‘생존’을 넘어 ‘존엄’을 말한다.
파이어족(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을 꿈꾸는 청년들이 있다.
무리한 소비 대신 절제된 삶을 추구하고, 일찍 은퇴해 자율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지속가능성'을 키워드로 삼는 MZ세대는 기후위기 앞에서 기업과 정부를 감시하며, 친환경 소비와 행동에 적극적이다.
‘내가 사는 곳이 곧 세계다’라는 생각으로 지역에서 농사짓고, 로컬 크리에이터로 일하며, 도시 대신 시골을 선택하는 청년도 늘고 있다.
이런 흐름은 단지 생존 전략이 아니다.
이것은 문명의 전환 징후다.
속도와 효율, 경쟁과 성장의 패러다임에 맞서
연대와 배려, 자율과 돌봄의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는 혁명이다.
청년은 더 이상 미래를 예약받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 방식으로 미래를 다시 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 새로운 상상력이야말로
망할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를 구할 마지막 희망인지도 모른다.
제3절 연대의 언어, 청년이 만든 정치
정치란 무엇인가?
기득권의 싸움인가, 계파의 음모인가, 아니면 거대 담론을 주고받는 엘리트의 유희인가?
적어도 이 땅의 청년들은 그런 정치에 절망했고,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정치의 언어를, 새로운 방식의 연대를 통해 직접 만들어내고 있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온라인에서—
청년들은 기존의 낡은 정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며, 정치적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촛불집회가 그 첫 번째 증거였다.
“이게 나라냐”는 분노의 문장이 광장을 가득 채웠고,
그 중심에는 기성 정당이 아니라, 청년의 분노와 상상력이 있었다.
청년의 정치는 의회에 진입하기보다
먼저 일상의 정치를 되찾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생활협동조합, 청년 공유주택, 협업공간, 청년 지자체정책 모니터링…
그들은 불평만 하지 않았다.
작은 공간에서 스스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며
‘정치’라는 말을 다시 살려내고 있었다.
청년정치인도 늘고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건 나이나 당선 여부가 아니라 정치를 대하는 태도다.
권력을 향한 욕망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책임으로부터 시작하는 정치, 기존의 언어가 아니라 연대의 언어로 말하는 정치,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정치다.
물론 이들의 정치는 여전히 미약하다.
기성의 벽은 높고, 변화는 느리다.
하지만 가장 깊은 뿌리는 눈에 띄지 않게 자란다.
청년들이 지금 심고 있는 민주주의의 씨앗은 언젠가 한국 사회의 토양을 바꾸는 거대한 뿌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지 말아야 한다.
“청년들은 왜 투표를 하지 않지?”
대신 이렇게 물어야 한다.
“청년들의 언어에 귀를 기울였는가?”
“그들의 절망과 가능성을 함께 보았는가?”
한국은 아직 망하지 않았다.
청년이 정치의 언어를 되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언어는 권력의 언어가 아닌 연대와 존엄, 그리고 희망의 언어다.
제4절 세대가 아닌 시대를 바꾸는 힘
흔히 청년 문제를 말할 때, 그것은 마치 '청년 개인의 문제'이거나 '세대 간의 갈등'으로 치환되곤 한다.
“요즘 애들은 노력하지 않는다.”
“꼰대들은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는다.”
이러한 프레임은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청년은 세대를 대표하는 존재가 아니라, 시대를 이끌어갈 주체다.
청년이 마주한 현실은 단순한 세대 간의 갈등이 아니라, 구조의 위기이자 시스템의 고장이다.
일자리는 줄고, 부동산은 하늘을 뚫으며, 정치는 기득권만의 잔치가 되었고, 미래는 ‘포기해야 할 것’으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청년들은 세대 프레임을 넘어 시대 전환의 감각을 키워내고 있다.
기성세대가 말하는 '성공'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가치'와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
서울의 집값보다 ‘지속 가능한 삶’을 고민하고, 연봉보다 ‘관계의 질’을 선택하고,
승진보다 ‘자기 다운 삶’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은 단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가 아니다.
문명 전환의 조짐이며, 패러다임의 전복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성공’은
‘타인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남는 것’이다.
공정과 정의, 다양성과 포용,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낡은 정치가 외면했던 화두를
청년들은 일상에서 끌어올리고 있다.
우리는 이 세대가 아니라, 이 시대의 징후를 읽어야 한다.
청년은 경고이자 희망이다.
지금의 청년은 “기성세대가 남긴 잔해를 치우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최초의 세대”이다.
그리고 이들은 세대를 넘은 연대의 정치를 실험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년을 위하여’가 아니라 ‘청년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청년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응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