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나라가 남긴 거대한 상처
국가연구 12- 벨기에
작은 나라가 남긴 거대한 상처 – 콩고,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기억
1. 인구와 규모로 보면 작은 나라, 그러나 유럽 정치의 중심에 서 있는 벨기에
벨기에는 유럽 북서부에 자리한 입헌군주국이다.
수도 브뤼셀에는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가 모여 있다.
국가의 크기만 놓고 보면, 국토 면적 약 3만 5백㎢, 인구 약 1,170만 명 정도로 유럽의 수많은 중소국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국제 정치 무대에서 벨기에가 차지하는 상징적 위치는 결코 작지 않다.
이 나라는 내부 구조부터가 단순하지 않다. 북부에는 네덜란드어를 쓰는 플랑드르 지방이 있고, 남부에는 프랑스어권인 왈롱 지방이 자리한다. 수도 브뤼셀은 두 언어가 모두 사용되는 특수한 공간이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집단이 한 나라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구조인 만큼, 벨기에라는 국가는 태생부터 “하나의 민족국가”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공동체가 만들어낸 정치적 타협의 결과라고 보는 편이 더 가깝다.
이 복잡한 내부 구성이, 훗날 벨기에가 바깥 세계를 향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2. 여러 제국에 지배되던 변방에서 뒤늦게 등장한 독립국가
벨기에 영토는 오랫동안 누군가의 중심이 아니라, 항상 다른 제국의 변방이었다.
스페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프랑스 등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 일부로 편입했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군대는 이 땅을 지나갔고, 국경선은 권력의 이동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다.
그런 땅에서 지금의 벨기에가 독립국가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이다.
1830년, 벨기에는 네덜란드 연합왕국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을 선언하고, 이후 입헌군주국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독립의 순간에도 이 나라는 이미 언어와 문화의 경계가 겹쳐진 공간이었다. 북쪽과 남쪽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벨기에는 독립 이후에도 오랫동안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무언가”, 다시 말해 국가적 자부심과 상징이 필요했다. 이 결핍감이 나중에 식민지를 향한 욕망과 만나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역사적 결정을 밀어붙이게 된다.
3. 유럽 열강의 제국 경쟁 속에서, 벨기에도 식민지를 꿈꾸다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은 앞다투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나누어 갖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광대한 식민 제국을 구축했고, 독일과 이탈리아도 뒤늦게 이 경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가 느낀 감정은 단순한 부러움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벨기에라는 나라의 크기와 무관하게, 자신을 “제국의 군주”로 만들고 싶어 했다.
문제는 벨기에 국민과 의회가 식민지 확장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가 재정을 투입해 멀리 떨어진 식민지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도 적지 않았다. 그러자 레오폴드 2세는 파격적이고도 위험한 선택을 한다. 그는 벨기에 국가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 개인의 이름’으로 아프리카 콩고 지역을 확보하고, 국제사회로부터 이를 인정받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바로 ‘콩고 자유국(Congo Free State)’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지만, 실제로 그 땅은 곧 자유와 가장 먼 곳, 왕 개인의 이윤을 위한 거대한 사유지로 변모한다.
4. 콩고에서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것은, 사실 제도화된 잔혹과 시스템 폭력이었다
콩고 자유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도, 문화도, 삶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무와 상아 같은 자원이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유럽에서는 고무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고, 레오폴드 2세는 이를 거대한 수익의 원천으로 삼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콩고 주민들은 강제노동 체계로 묶였다. 각 마을과 가족에게는 반드시 채워야 할 고무 생산 할당량이 부과되었고, 이를 채우지 못하면 폭력이 뒤따랐다. 채찍질과 구타는 물론이고, 마을을 통째로 불태우거나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가는 일도 벌어졌다. 무엇보다 악명 높은 것은 신체 절단이었다.
식민지 군인들은 총알을 얼마나 사용했는지 보고해야 했고, 그 증거로 “죽인 사람의 잘린 손”을 제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결과 실제로 사살된 이들의 손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손이 잘려 나가는 일도 빈번했다. 손은 단지 몸의 일부가 아니라, 이 체제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숫자와 성과 지표로 환원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학자들에 따라 추정치는 다르지만, 그 시기 콩고에서 사라진 생명은 수백만 명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많다.
레오폴드 2세는 이 모든 것을 “문명화”, “노예제 폐지”, “기독교 선교”라는 명분으로 포장했다. 그러나 실상은 문명의 언어를 빌린 자본과 폭력의 결합이었다.
문명이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폭력을 숨기는 가면이 될 수 있는지를, 콩고의 역사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제사회에서 비난 여론이 커지고, 내부 고발과 폭로가 이어지자 1908년이 되어서야 콩고는 레오폴드 2세 개인 소유에서 벨기에 국가의 공식 식민지로 전환된다. 이후 ‘벨기에령 콩고’라는 이름이 붙지만, 착취의 구조가 단번에 바뀐 것은 아니었다. 콩고가 독립을 맞이한 것은 1960년, 그 사이 남겨진 상처는 지금도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5. 식민지 과거와 마주하려는 시도는 늦게 시작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벨기에는 오랫동안 이 식민지 역사를 부분적으로만, 혹은 불편한 진실은 피한 채 다루어 왔다.
교과서에서 콩고의 비극은 축소되거나, “당시 시대 상황”이라는 말로 희석되기도 했다. 시민사회와 학계, 피해자 후손들의 문제 제기가 거듭되면서야 비로소 정부와 왕실이 조심스럽게 “유감”과 “사과”라는 표현을 꺼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법원 차원에서 식민지 시기 강제 분리·차별 등을 인권 침해이자 인류에 대한 범죄로 인정하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이는 단지 과거 한 사건에 대한 판결이 아니라, 식민주의 그 자체가 인류 보편 윤리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어떤 범죄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법적 판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식민지배로 이익을 얻은 기업과 기관, 그 체제에 가담했던 사람들, 그리고 이를 오랫동안 침묵 속에 방치해 온 국가의 책임은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역사를 앞으로 어떻게 기억하고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벨기에는 이제야 막 이 질문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6. 한국과 벨기에는 다른 위치에서 식민주의의 그림자와 마주 보고 있다
한국과 벨기에는 서로를 직접 지배하거나 지배당한 관계는 아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보면 두 나라는 멀리 떨어진 나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식민주의의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비슷한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벨기에는 콩고를 비롯한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가해국의 위치에 있었고,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피해국의 위치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나라가 던지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은 이렇게 묻는다.
“가해자는 언제, 어디까지 진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가.
과거를 부인하거나 축소하는 태도는 결국 또 다른 폭력이 아닌가.”
벨기에는 다른 방식으로 묻게 된다.
“이미 지나간 역사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범죄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늦게라도 책임을 인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보상과 기억을 조직해야 하는가.”
여기에 하나의 역설적인 연결고리가 더 있다.
벨기에는 한국전쟁 당시 소규모이긴 하지만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이 말은 곧, 한쪽에서는 식민지 피해자였던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는 ‘국제질서’를 지키는 이름으로 파병된 군대를 맞이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모순적인 장면은 국가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두 나라는 경제·산업·외교 분야에서 협력 파트너로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관계가 우호적이라는 사실이 언제나 존중과 품격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때로는 한 사건이 국가 간 관계의 바닥에 숨어 있던 감각을 갑자기 드러내기도 한다.
2021년 서울에서 벌어진 주한 벨기에 대사 부인의 폭행 사건은 그런 장면 중 하나였다. 한 외교관 가족이 타국의 시민을 폭행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사람들의 분노를 더 크게 만든 것은 ‘외교적 지위’가 책임의 경계를 흐릴 수 있다는 구조적 불쾌감이었다.
폭력은 개인의 일탈로 끝낼 수 있지만, 특권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건 하나로 벨기에라는 나라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콩고에서 벌어진 폭력의 역사를 떠올릴 때,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제국주의가 남긴 것은 영토나 자원만이었는가. 아니면 어떤 인간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특권의 습관, 폭력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무의식의 감각까지 남긴 것은 아닌가.
벨기에의 식민 폭력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그 역사적 기억은 현재의 윤리를 시험한다.
특히 외교라는 영역에서, ‘특권’이 존엄을 침범하는 순간 그것은 국가 관계의 문제가 된다.
한국과 벨기에는 단지 교역과 협력만을 나누는 관계가 아니라, 가해와 피해의 역사, 기억과 책임의 윤리를 서로 다른 위치에서 성찰할 수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두 나라가 함께 마주해야 할 질문은 단순하다.
경제적 협력은 관계를 넓힐 수 있지만, 존엄에 대한 감각이 무너지면 관계는 단 한 번의 사건으로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
식민주의를 마주 보는 시선에서, 한국과 벨기에는 서로에게 하나의 거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7. 작은 나라 벨기에가 남긴 질문은, 결국 문명과 인간성의 본질을 향한다
인구 1,170만 명 남짓의 작은 나라.
그럼에도 벨기에는 세계사에서 결코 작은 상처를 남기지 않았다.
콩고에서 자행된 폭력과 착취의 역사는 “문명”과 “발전”, “선교”와 “질서”라는 말이 얼마나 손쉽게 폭력을 포장하는 언어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다.
그래서 벨기에의 역사는 단지 한 나라의 과오를 묻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국가의 크기가 작으면, 그 책임도 작은가?
시간이 오래 흘렀다면, 죄도 자연스럽게 희미해지는가?
문명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은, 언제부터 진정한 문명에 대한 모독으로 불리게 되는가?
그리고 한국은 여기에 또 다른 질문을 더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를 저지른 자들’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넘어서,
‘우리가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인류에게 가해진 폭력’까지 어디까지 기억하고 연대할 것인가.”
벨기에의 콩고는 과거 한 구석의 비극적 사건이 아니라,
문명과 비문명, 발전과 폭력,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인류가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되묻는 역사적 질문이다.
작은 나라가 남긴 이 질문은, 그래서 결코 작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 사이에서, 묘한 연속성을 발견하게 된다.
콩고에서 잘려 나간 손이 “식민 체제의 성과 지표”였던 것처럼, 서울에서 울린 따귀 또한 “특권이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작은 균열이었다.
폭력의 규모는 다르지만, 폭력을 정당화하는 감각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역사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더 작고 일상적인 얼굴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