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을 건드리면 패가망신한다.”
[논단] ‘패가망신’은 누구에게만 적용되는가
“한국인을 건드리면 패가망신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월, 초국가 스캠 범죄 대응 현장을 방문해 이렇게 말했다.
보이스피싱과 노쇼 사기 등 해외 거점을 둔 범죄조직을 향한 강한 경고였다.
대통령은 이 발언을 국내용 메시지에 그치지 않게 했다.
“동남아 현지 언론에도 적극 알리라”고 주문하며, 국가의 단호한 의지를 외부로 확산시키려 했다.
이 말은 선언이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처럼 들렸고, 많은 이들에게 통쾌함을 안겼다.
그러나 질문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이 선언은 과연 모든 ‘한국인을 건드리는 행위’에 적용되는가,
아니면 특정 대상에게만 선택적으로 적용되는가라는 질문이다.
국가의 위엄은 말의 수위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말이 누구에게, 어디까지, 일관되게 적용되는가에서 드러난다.
강자에게는 침묵하고, 약자에게만 강한 국가
동남아 범죄조직을 향해서는
“패가망신”이라는 극단적으로 강한 언어가 사용된다.
공개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공포를 조성하고, 억지 효과를 노린다.
반면, 미국 조지아주 현대자동차 공장과 관련해
한국인 기술자들이 미국 이민단속 당국에 의해 집단 단속·조사·구금 또는 추방 위협에 놓였을 때,
국가의 언어는 갑자기 사라졌다.
외교적 항의가 있었는지,
대사관 차원의 적극적 보호 조치가 있었는지,
재발 방지를 요구했는지에 대해 정부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미국 내 이민 단속을 집행한 주체는 ICE다.
문제가 된 현장은 한국 기업의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진 핵심 생산기지이며,
이 사안은 개인의 일탈이나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동맹 관계, 국민 보호 의무, 국가의 책임이 동시에 걸린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 문제를
“상대국의 국내법 집행 문제”
“외교적 마찰을 고려해야 할 사안”
이라는 말로 사실상 얼버무렸다.
이 지점에서 국가는 분명한 선택을 한다.
약한 상대에게는 원칙을 들이대고,
강한 상대 앞에서는 원칙을 접는다.
‘동맹’이라는 이름의 면책 구조
동맹은 보호를 전제로 한다.
최소한 동맹국의 국민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문제 제기와 외교적 항의는 갈등이 아니라 의무다.
그러나 한국 외교는 오랫동안
동맹을 보호 장치가 아니라
침묵의 이유, 면책의 근거로 사용해 왔다.
“동맹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은
점점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었고,
국민은 보호 대상이 아니라
외교적 부담을 키우지 않기 위해 관리해야 할 변수로 취급된다.
그 결과는 단순하다.
한국인은 해외에서
‘건드려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존재’가 되고,
국가는 그 사실을 알고도 공개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이 구조 속에서 나오는
“한국인을 건드리면 패가망신한다”는 말은
의지가 아니라 희망적 수사에 가까워진다.
선언이 약속이 되기 위한 조건
강한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는 말로 기억되지 않는다.
어디서 침묵했는지로 기억된다.
만약 대통령의 발언이 진심이라면,
그 선언은 범죄조직 앞에서만이 아니라
동맹국 앞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해야 한다.
한국인이 집단 단속을 당했을 때, 공식 항의는 있었는가
재발 방지를 요구했는가
외교 채널을 통해 명확한 선을 그었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지 않는 한,
“패가망신”은 경고가 아니라 선별적 위협에 머문다.
국가는 누구 편인가
국가는 중립적이지 않다.
국가는 항상 누군가의 편이다.
문제는 그 편이 국민이냐, 아니면 권력이냐는 것이다.
국민이 해외에서 집단 단속·구금·추방 위협을 받을 때
국가가 침묵한다면,
그 국가는 이미 선택을 끝낸 것이다.
그 선택은 중립이 아니라 방관이며,
방관은 언제나 강자의 편으로 귀결된다.
대통령의 말처럼
“한국인을 건드리면 패가망신”이라는 선언이
진짜 국가의 언어라면,
그 말은 불편한 자리에서도,
외교적 비용이 따르는 순간에도
같은 무게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말은 위엄이 아니라 연출이고,
의지가 아니라 구호이며,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국민에게 들려주기 위한 위로의 문장에 불과하다.
국가는 묻지 않는다.
국민이 묻는다.
국가는 누구 편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국가는
아무리 큰 목소리를 내도
결코 강한 국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