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린 버스커

by 노용우

3곡을 연달아 부른 첫 번째 버스커가 관중을 향해 ‘마지막 곡은 신청 곡으로 하겠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노래를 신청했다.

"슬픈 노래요."

"네?

노래 제목이 슬픈 노래인가요?"

"아뇨.

그냥, 슬픈 노래 아무거나 해주쇼."


늙수그레한 머리 허연 노인네가 젊은이들이 모이는 거리 공연에 손을 번쩍 들고 노래를 신청하는 것도 주책맞지만 뜬금없이 슬픈 노래라니…?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한낮인데도 날씨치고는 쌀쌀했다. 버스킹이 시작될 무렵인 2시경, 다행히 바람이 잦아들며 내리던 보슬비도 그쳤다. 날씨 탓이겠지만 토요일 오후인데도 카페 거리는 축제가 무색하리만치 한산하다 못해 썰렁하기까지 했다. 가로등 기둥마다 매달린 축제 플래카드는 비에 젖어 처량해 보였다.

숍인숍 행사에 참여하는 카페들을 방문하던 중 멀리서 애잔한 노래가 들려왔다. 버스킹이 시작된 듯했다. 끄물끄물한 날씨에 비까지 내린 우중충한 거리에 잔잔히 울려 퍼지는 낮은 음색의 진중한 노래는 35년 전 미국으로 떠나기 전, 좋아하던 포크송 가수 김광석을 떠오르게 했다. 영락없는 김광석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카페 갤러리 둘러보기는 뒤로 미루고 버스킹 무대를 찾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미국으로 떠나던 해 김목경이라는 가수가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란 노래를 발표했다. 제목이나 가사 내용이 대놓고 60대 노인티가 나는 노래여서 그 당시 나로서는 좋아할 수 없는 노래였다. 내가 미국으로 온 지 몇 년 후 김광석도 이 노래를 불렀으나 들어 본 적은 없었다. 노래를 발표하고 32살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그의 마지막 노래가 되었다. 오랜 세월 미국에서 사는 동안 김광석도, 노래도 서서히 잊혀 갔다.


오늘,

뜻밖에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김광석의 음색을 가진 포크송 버스커를 만났다.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신청곡으로 들어볼 수 있다면 김광석 본인은 아니지만 35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기대하며 버스커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좋아하던 김광석, 그의 순박한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버스커의 첫 곡이 끝났다.

무명 가수이지만 이런 잔잔하고 애잔한 노래를 썩 잘하는 가수이니 다음 곡도 당연히 느낌이 비슷한 노래를 부르리라 기대했다. 두 번째 노래가 시작되었다.


어? 빠른 노래?


기대한 김광석 풍의 진득하고 애잔한 노래는 아니었다. 설마 이 노래가 마지막은 아니겠지. 그가 한 곡을 더 부를지는 모르지만, 다음 곡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잘하시는 잔잔한 노래를 하시지 않고 뭔 빠른 노래일까?” 우두커니 서서 듣는 둥 마는 둥, 마음은 벌써 다음 곡에 가 있었다.


두 번째 곡이 끝났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3번째 곡을 기다렸다. 가수가 준비한 노래가 있을 텐데 주책맞게 불쑥 신청 곡을 말할 수도 없고...


3번째 곡,

이번엔 숫제 떼창과 박수까지 유도하는 댄스곡이었다. 젊은이들 축제 공연에 맞게 첫곡과는 달리 흥겨운 노래 위주로 준비한 모양이었다. 젊은 청중들은 손뼉을 치며 흥겨워했다.

'내가 지금 떼창을 부를 기분이냐?

첫 곡처럼 잘하는 슬픈 노래, 진득한 노래, 김광석 풍의 노래를 부르잖고 비 오는 날 뭔 방정맞은 댄스곡이야?'


노래를 부르든가 말든가 버스킹 공연은 그만 포기하고 중단했던 숍인숍 카페 갤러리를 돌아볼 생각으로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카페 골목으로 되돌아가려면 미안하게도 노래에 열중인 가수 앞을 지나가야 해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세 번째 떼창이 끝났다.

여러분 즐거우세요?

마지막 곡은

신청곡으로 하겠습니다.


악...!

신청 곡을 받겠다는 버스커의 맨트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손부터 번쩍 들었다. 무명 가수가 신청 곡을 받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왜냐면 자기 원곡 노래는 없을 게 뻔하고 설령 있다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노래일 테니 많은 다른 가수들 중 무슨 노래를 신청할지 알고 신청 곡을 받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노래를 신청하란다. 너무 반가워 허둥댔다.


에잇,

미안하지만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신청해자


그러나 막상 노래 제목을 또박또박 한 단어씩 말하려니 도대체 너무 길고 길어서 입이 안 떨어졌다.

김광석의 많은 다른 노래 제목은 잊혀서 떠오르지도 않고, 손은 번쩍 들었고, 마음은 급했고, 입은 더듬거리고.... 당황했다. 그만 엉뚱하게도

"슬픈 노래, 아무거나요.”라고 말해버린 거다.


잠시 후,

소름이 돋는 기묘한 일을 바로 눈앞에서 경험하게 된다. 로또를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아,

저 아버님께서 슬픈 노래는

아무거나 좋으시다고 신청하셨습

니다. 그러면 제가 부를 노래는......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악!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너 무당이니? 내 속이 죄다 들여다보여? 슬픈 노래고 뭐고 노래가 귀에 들릴 리 없었다. 김광석의 김 자라도 말했다면 또 모르겠다.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가수 중에 족집게 무당처럼 단번에 김광석이고, 단번에 그 노래냐고?


도무지 정신이 없다.

노래는 듣는 둥 마는 둥... 못 듣고 말았다.


6개 숍인숍 카페 중 상호가 특이해서 다른 집보다 쉽게 눈에 띄리라 생각한 <수레와 달구지>는 어디에 숨어있는지... 카페거리를 3번째 찾아 돌고 있다. 수레야, 달구지야, 어디에 숨어있니? 결국 버스킹 무대 옆에 임시로 만든 페스티벌 주최 부스의 직원에게 문의했다. 직원은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요기요, 요기요, 하며 땅바닥을 가리킨다. 직원이 가리키는 땅바닥은 바로 차량 정비소 입구 앞이었다. 정비소 한쪽 벽 앞에 버스킹 무대와 재단 부스를 설치한 거였다. 카페 상호가 수레와 달구지가 아니고 정말 차량 정비소였다. 카페거리에 차량 정비소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고 정비소안에 예술작품을 전시하리라고 누군들 생각이나 했을까? 첫 번째 버스킹 공연을 보느라 한참을 수레와 달구지 입구 바로 앞에 머물렀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했다. 2번이나 찾아 헤매던 <수레와 달구지>는 어처구니없게도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내 머릿속에 있던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무슨 수로 버스커는 끄집어냈을까? 소경이 문고리 잡듯 우연히 맞아떨어진 걸까? 아니면 확률을 들여다보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바로 내 눈앞에 빤히 보이는 '수레와 달구지'를 찾아 헤맨 아둔한 나는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본 그 버스커는 분명 신들린 버스커였다.

작가의 이전글막걸리 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