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 들러 얼굴 상태를 살폈다. 눈은 퉁퉁 부어 감은 건지 뜬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은 연신 손등으로 비벼대서 세수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알아볼 사람은 없겠지만 황급히 도망치듯 공연장 로비를 빠져나왔다. 혼자였으니 망정이지 연극을 보는 내내 훌쩍거린 울보라고 소문날 뻔했다.
5월의 햇살,
이미 연극 정보는 알고 있었지만, 이 연극을 꼭 보겠다고 결심을 굳힌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가수 이선희다.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미국 유학 준비를 하던 해인 1989년, 가수 이선희는 5.18 민주화 운동을 주제로 한 '5월의 햇살'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계엄으로 정권을 쥔 전두환 군사정권의 바통(baton)을 거저먹기로 거머쥔 노태우 정권, 여전히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유명 가수가 5.18을 주제로 대중가요를 부르다니.... 깜짝 놀랐다,
이선희 괜찮을까?
걱정들을 하던 시절이었다. 신군부 계엄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악착같이 은폐된 5.18의 참상은 다음 정권에서도 알려지지 않았고 소문으로만 알고 있던 광주 항쟁의 실상을 모른 채 나는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노래가 발표된 1989년이나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귀국했을 때나 5.18의 실상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5.18 참상을 뉴스로 접했던 적이 없는 나로선 이 연극을 (알베르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을 각색) 꼭 봐야 할 의무감마저 들었었다. 연극을 꼭 보겠다는 또 다른 이유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였다.
날마다 무던히도 울었다. 너무 무참해서 울었고 어이없이 죽어간 젊은이들이 너무 가련해서 울었다. 책만 펼치면 훌쩍거렸다. 멀쩡하다가도 그 책을 손에 들면 벌써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곤 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은 ‘어머니’란 단어만 들어도 눈물을 쏟았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소년이라는 단어를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수상해진다.
공연은 4시 30분경에 끝났다.
무려 1시간 이상을 훌쩍거렸으니 작은 눈이 더 작아질 수밖에. 6시 약속 시각까지는 아직 충분했다. 기분이 이렇게 참담하니 막걸리라도 한 잔 하고 싶었지만, 친구를 만나면 술을 하게 될 것이 뻔한데 그냥 약속 장소인 송내역 광장까지 천천히 걷기로 했다. 사람 감정이 이렇게도 변덕스럽고 간사할까. 어깨까지 들썩이며 훌쩍이던 울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시 후에 먹게 될 안줏거리를 궁리하고 있다. 무얼 먹을지 항상 까탈을 부린다. 까탈 부려봤자 결국 대패삼겹살 아니면 보쌈, 둘 중에 하나면서....
나는 외식을 하지 않는다.
직장에 다닐 때도 점심 식사( 닭가슴살 주스)를 배낭에 넣어 다녔다. 일을 안 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술안주다.
안주를 배낭에 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고 여럿이 모이는 술자리에서 내 안주만 별도로 주문할 수도 없는지라 술안주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소금을 첨가하지 않는 음식이나 염분 조절을 손님이 직접 할 수 있는 종류로 제한한다. 예를 들면 양념 안 한 구이 종류나 보쌈 종류다. 섭취 시 손님 기호에 따라 염분 조절이 가능한 안줏거리다. 허구한 날 삼겹살 구이 종류 아니면 보쌈 종류다(고추냉이, 간장 살짝 생선회도 간혹). 누굴 만나든 삼겹살이나 보쌈으로 슬쩍 유도하면 100이면 100, 어쩌고 저쩌고 별말 없이 무사히 통과된다. 내 개인 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아도 의견은 통합된다.
"도대체 왜 그러고 살아?"
"궁상맞게 왜 이러고 사냐고?"
라면을 먹으면 눕지 못하고 혈압이 내려가기를 앉아서 기다리는 고혈압 환자 ( 혈압약은 끊었지만)이기 때문이다. 라면 한 그릇 편하게 못 먹는 신세니 소문난 맛집인들 무슨 관심이 있을까. 환자 신세에 삼겹살구이나 보쌈에 술 한잔이면 그게 어디야. 사실 요즘 나도 생각 중이긴 하다. 내 인생에 언제까지 허구한 날 Salt(소금조심), Stress(성질머리조심), Sport(운동조심), 3S에 붙들려 조마조마 살아야 하나. 먹고 싶은 것 맘대로 못 먹고 그 숱한 맛집 한 번 못 가보고 맨날 대패 삼겹살에 족발, 보쌈이어야 하나. 드디어 안줏거리 하나 찾았다. 오월의 햇살을 만나 훌쩍이던 날, 술안주 하나 추가했다. 불 주꾸미다. 막걸리가에 매운 음식이 당기는 날이었다.
그 식당은 내가 다니는 헬스장 건너편에 있다. 헬스장 출입은 직장 다닐 때 습관대로 늘 해 질 녘인 7시쯤 운동을 시작해서 한밤중인 9시쯤에 헬스장을 나선다. 9시 이후 길 건너편은 항상 컴컴하다. 변변한 가게 하나 없는 한적한 동네이기 때문이다. 식당 뒤편은 1호선 지하철이 지상으로 지나는 구간으로 철로를 따라 방음벽으로 길게 막혀있는 지역이라서 상권이 그리 활발한 지역이 아니다. 9시면 다른 동네 상가는 한참 손님이 있을 시간이지만 여긴 영업이 끝난 이발소 벽에 혼자 돌아가는 소용돌이 사인 조명등과 희미한 가로등 이외는 다른 상가 불빛은 없다. 헬스장을 나서는 9시 이후에는 그 식당 간판 불도 늘 꺼져있는 상태라서 그곳에 식당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어? 저 집 앞에 웬 줄이 저렇게 길어?
시민회관에서 5월의 햇살 연극을 본 후 약속 장소인 송내역으로 가기 위해선 내가 다니는 헬스장 앞을 지나가야 한다. 오후 5시경 훤한 낮에 헬스장 앞을 지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늘 컴컴하던 건너편에 식당 간판이 보였다. 불주꾸미? 그 식당 앞에 제법 긴 줄이 보였다. 저 집이 줄 서는 식당이었어? 깜짝 놀랐다. 이 동네에 웬 줄 서는 집? 늘 가로등 불빛과 이발소 뺑뺑이 사인만 보이던 한적한 길 건너편 동네에 줄 서는 집이 있었다는 게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무슨 음식점이기에 줄을 서지? 불 주꾸미...? 주꾸미를 석쇠에 올려 연탄불이든, 숯불이든 굽는 식당인가? 아니면 매운맛이 불처럼 화끈하다는 걸까? 오늘도 아마 송내역 근처의 어느 주점에서 대패 삼겹살 아니면 보쌈을 먹겠지만, 불 주꾸미가 혹시 곰장어 구이나 민물장어구이처럼, 주꾸미를 굽는 집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잠시 했었다. 훤한 대낮부터 줄을 서는 것으로 미루어 소문난 집은 분명한데 한참 손님이 있을 9시경에 왜 늘 불이 꺼져있었는지도 궁금하고... 내 발걸음은 길을 건너 그 집을 향하고 있었다. 출입문 옆에 안내판이 보였다.
□오전영업 : 11:00~15:00
Break Time
□오후영업 : 17:00~21:00
9시에 영업 종료라서 늘 간판이 꺼졌었구먼. 오후 영업 시작인 5시가 되자 줄을 섰던 손님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식당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식당은 만석이 되며 입장 못 한 손님들은 대기자 명부에 기재하고 그대로 길 위에 서 계셨다. 창문 밖에서 들여다보이는 음식들로 가득한 상차림과 벽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번갈아 훑어보았다. 도토리 전, 도토리 묵사발, 샐러드, 열무물김치, 삼색나물과 된장국이 보이고 불주꾸미는 구이는 아니었다. 메뉴 이름으로 미루어 밥도 제공되는 볶음 요리인 듯했다. 된장국 이외는 소금을 첨가하는 음식들이 아니었다. 반가웠다. 밥을 비비지 않고 볶은 주꾸미만 막걸리 안주로 하고 비빔장은 남긴다면 염분은 걱정할 만큼은 아닌 듯했다. " 까짓, 매운 음식 한 번 먹어보자." 주저 없이 대기자 명부에 이름을 기재했다. 6시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식당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전화했다. 화들짝 놀란다. "불 주꾸미? 삼겹살집이 아니고?" 웬일이래? 의아해하는 눈치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눈퉁이는 퉁퉁 붓고..." 식당으로 찾아온 친구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한 말에 나는 그저 피식 웃었다. 5월의 햇살을 만나 훌쩍이던 날 매운 안주 거리 하나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