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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도남 Feb 04. 2024

루이저 로스차일드의 벼룩 실험 -1-

과한 통제 속에서 자란 아이의 삶이 흘러간 방향

<벼룩 실험>

미국의 루이저 로스차일드 박사는 어느 날 벼룩의 점프력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 그는 한 무리의 벼룩을 실험용 대형 용기에 집어넣고, 투명한 유리로 덮었다. 그러자 뛰어오르는 습성이 있는 벼룩들이 유리 덮개에 부딪혀 '탁탁'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얼마 뒤 소리가 잦아들자 그는 유리 덮개를 열었다. 벼룩들은 여전히 뛰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모두 뛰는 높이가 유리 덮개 근처까지로 일정했다. 충분히 용기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데도 벼룩들은 덮개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으려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벼룩 실험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 봤으리라 생각한다. 보통 벼룩 실험 이야기를 통해서 얻어가야 할 교훈은 자신의 한계를 정하지 말라는 메시지이고, 그래서 이 실험은 자기 계발서나 투자 관련 도서에 간혹 인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로스차일드가 진행한 벼룩 실험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추가 실험>

로스차일드는 한 가지 실험을 추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벼룩이 들어 있는 용기 밑에 알코올램프를 두고 불을 붙였다. 5분도 안 되어서 용기는 뜨거워졌고, 모든 벼룩들이 자연스레 생존 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벼룩들은 머리가 유리 덮개에 부딪히든 말든 최대한 높이 뛰어 모두 용기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로스 차일드가 수행한 모든 실험에 대해 알게 된 후,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인생이 이 실험으로 대변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해에 태어났다. 그 당시에는 형편이 넉넉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이 참 많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는 어떻게 보면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고, 그 와중에서도 우리 집이 좀 더 가난했다. 네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았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결국 아버지가 원양어선을 타러 나가셨다. 아버지가 원양 어선을 타고 나가 계신 기간 동안, 어머니가 생활비를 벌면서 나와 내 동생을 키우셨다. 할머니는 혹시나 어머니가 우리 형제를 고아원에 버리진 않을까 노심초사하시며, 구부정한 허리를 하고선 한달음에 우리 집으로 오셨다. 어머니는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생활비도 벌어야만 하는 힘든 삶을 정신력으로 지탱하시며, 기어코 우리를 키워내셨다. 물론 원양 어선을 타고 오신 후에 철야로 회사에서 일하시며,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신 아버지 역시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시다. 지금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어머니의 양육 방식에 과한 통제가 자리 잡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이 되는 것이며, 두 번째는 부모가 된 현시점에 나는 어머니의 양육 방식을 존중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삶을 존경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 이다. 한 때, 어머니를 미워하다 못해 증오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나서 보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많이 보이고 그때, 어머니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약간은 이해할 수는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원양어선을 타고 돌아오신 후, 어머니와 아버지는 근면 성실히 삶을 살아오신 덕분에 점차적으로 형편이 나아지게 되었다. 단칸방에서 살다가 방 두 칸에 화장실과 부엌이 딸린 집에서 살게 되었고, 내가 초등학교 5학년에 올라가게 되던 해에 27평짜리 아파트로 이사가게 되었다. 부모님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처절히 절약하고 저축해서, 가족이 안정적으로 살 거처를 마련하시는 데 성공하셨다. 그리고 의식주가 해결된 후, 어머니는 나와 동생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셨다.


나보다 2살 어린 내 동생은 IQ가 150 이상인 상당히 머리가 좋은 녀석이었다. 나와 함께 학습지를 신청해서 같이 하고 있었는데 동생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학습지 풀기를 끝내 놓고, 놀러 나가기 일쑤였다. 근데 그렇게 대충 푼 것 같은 학습지의 채점 결과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보면 좀 옛날 사람이었기에 동생이 머리가 좋은 것은 기쁜 일이지만, 상대적으로 머리가 떨어지는(그렇다고 내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장남의 학습 능력을 어떻게 하면 더 올릴 수 있을지 고민하셨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우리 집에 떨어졌다. 그간 먹은걸 자꾸 토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해왔던 동생을 여러 병원에 데려가도 차도가 없었다가, 대학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뇌종양 진단을 받은 것이었다. 생존율이 35% 정도 되는 20시간 이상의 수술을 이겨내고 동생은 다행스럽게도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워낙 어린 나이에 뇌에 큰 수술을 받게 되어 몸과 정신 모두 어느 정도 성장에 한계를 가지게 되어 버렸다. (동생은 지금도 장애등급을 가지고 있다.) 동생 수술 후, 부모님은 수없이 오랜 기간을 병원에서 지내셨고 그 기간 동안 우리 가족은 정말로 피폐 해졌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동생이 퇴원하고, 점점 건강을 되찾아 학교에 다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난 그때부터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동생이 퇴원해서 집에 온 시점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중일 때였다. 어머니는 당신이 근면성실하게 계획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오신 덕분에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안정적인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의료 보험 시스템이 미비했던 당시에 어마어마하게 비싼 동생 수술비와 병원비를 그간 충분히 저축한 돈 덕분에 감당할 수 있었기에 본인이 생각하는 삶의 방향이 절대적으로 옳음을 확고히 믿고 계셨다. 문제는 그 뱡향 속에 나의 학업이 너무나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끝날 즈음에 동생이 수술을 받았고, 동생이 퇴원에서 집에 온 게 8월 정도쯤이었던 것 같다. 솔직히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해봤자 13살짜리 아이일 뿐이다. 부모님의 케어 없이 13살짜리 아이가 공부를 꾸준히 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난 이미 동생이 퇴원한 시점에 6학년 성적이 엉망이 되어있는 상태였고, 6학년 성적표가 나오는 날 정말 많이 두드려 맞았다.(그 당시에는 초등학교 성적표에도 '수우미양가'가 적나라하게 표기되던 시절이었다.) 그때 어머니가 나에게 하신 말이 "네가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 있어?"였다. 저 말을 듣고 나는 엄마의 기대에 무조건 부흥해야 한다는 압박감, 추가로 동생을 위해서도 공부를 잘해야 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초등학교 6학년 짜리 아이에게는 저 말은 거의 폭력과 다름없게 느껴진다. 그렇게 내 초등학교 시절이 끝나고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중학교를 입학하기 전, 시험을 치게 되는데 해당 시험의 결과로 반 배정을 하게 되고 반 배정 후에는 등수를 알려줬었다. 어머니도 이러한 시스템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입학 후, 반 배정이 된 후에 네가 반에서 몇 등이냐고 계속해서 물어보셨다. 그 당시 난 반에서 4등을 했었는데 4등이라고 말하면 두드려 맞을 것 같아서 1등이라고 거짓말했다. 하지만 나중에 반에서 진짜 1등인 친구의 이름을 엄마가 어딘가에서 듣고는 나에게 정말 네가 1등 한 게 맞냐고 물어보셨다. 하지만 난 그냥 공동 1등이라고 또 거짓말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지만, 난 장담한다. 나와 같은 환경에서 압박감을 가진 저 나이 또래 아이라면 대다수는 비슷한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 이렇게 난 어머니가 만들어 낸 학업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중학교 입학의 첫 성적표를 거짓말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록 그때의 난 어렸지만 반에서 4등이라는 성적을 거짓말로 덮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나도 참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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