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며눌)
"추억 속 아버지의 일화"
엄동설한에 피어난 충절 속으로
어릴 적 아버지는 내 곁에 앉아 눈앞에 풍경이
펼쳐지듯 생생한 역사를 들려주셨다.
그중에서도 내 가슴에 깊이 새겨진 이름은 단종대왕과 그를 마지막까지 지켰던 영월 엄 씨 엄흥도였다
권력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 모두가 숨죽이던 시절, 영월 호장 엄흥도는 홀로 어린 임금의 시신을
등에 업고 아득한 산길을 헤매었다.
안치할 곳을 찾지 못해 절망하던 그가 마주한 것은 인기척 없는 산속의 노루 한 마리였다.
노루가 잠시 앉았다 일어난 자리에만 신기하게 눈이 녹아 있었는데, 그 따스한 온기가 남은 땅을 파서
어린 임금을 모셨다는 설화는 내 어린 마음에도
잊히지 않는 '역사의 보약'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영웅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셨고, 그것은 평생 내 삶을 지탱하는
올곧은 뿌리가 되었다.
저의 기억을 깨워주신 고인이 되신 아버지는
오늘날의 어떤 화젯거리보다 내게는
"평생 잊지 못할 위대한 영웅 이셨다."
가문의 의리와 충절, 송시열 선생과 정순왕후
아버지가 들려주신 역사 속에는 우리 가문의
자부심도 함께 흐르고 있었다. 야성 송 씨인 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후예라는 긍지를 품고 살아왔다.
역사 속에서 송시열 선생과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 씨의 관계는 가문의 의리와 충절을 상징하는
깊은 일화로 남아 있다.
비록 정순왕후는 15세기 인물이고
송시열 선생은 17세기 인물이라
약 200년의 세월 차이가 있지만, 송시열 선생은 가문의 까마득한 조상 격인 정순왕후를 극진히 예우하며 그 자취를 돌보는 데 정성을 다하셨다.
시대를 뛰어넘어 가문의 어른을 향한 도리를 다했던 송시열 선생의 정신은 내가 아버지를 통해 배운
인간의 도리와 그 궤를 같이하며 내 안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다.
"교정의 기억 속에 흐르던 조선의 맥"
초등학교 4학년 사회 시간, 김동운 선생님의
목소리를 통해 단종의 비극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이미 아버지께 들어 알고 있는 그 슬픔에
가슴이 먹먹했다. 조선 왕조시록을 나열해
외우라 하실 때, 내 머릿속엔 '단종'이라는
이름 앞에 눈 위를 걷던 엄흥도의 발자국과
가문의 어른인 정순왕후의 애달픈 삶이 먼저 그려졌다.
그 시절 우리가 목청껏 외우던 조선의
맥은 이러했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
영 정순헌철고순
최근 아들이 넷플릭스를 깔아주며 세상이 떠들썩하다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소식을 전해왔다. 천만 관객이 열광한다는 그 이야기는 결국 내 아버지께서 오래전 내게 주신 그 보약 같은 가문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셈이다.
"사돈댁과의 인연, 김수로왕 자손의 기품"
이러한 가문의 긍지는 아들의 결혼 전 상견례 자리에서도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김해 김 씨 김수로왕의 자손으로 늠름하게 자란 우리 아들을 보고 사돈댁에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통도사에 다니시며 깊은 불심을 닦아오신 사돈댁 어른께서는 상견례 전날 밤 예사롭지 않은
꿈을 꾸셨다 한다.
"오늘 이 집에 귀하디 귀한 왕이 한 분 들어오시니 정성을 다해 잘 모셔야 한다."
상견례 당일 문을 열고 들어서는 우리 아들을 보시자마자 사돈댁 어른들께서는 무릎을 치며 반가워하셨다. 키가 크고 기품 있는 아들의 모습에서 꿈속의 그 왕을 단번에 알아보신 것이다.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들의 남다른 기운을 사돈댁의 깊은 안목이 먼저 읽어주신 것이리라. 아들이 좋은 인연으로 피어난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아버지가 들려주신 엄흥도의 역사와 아들의 귀한 인연이 겹쳐지며 우리 가족의 서사는 더욱 깊고 풍성해졌다.
"봄날의 산소에서 올리는 차 한 잔"
50년 전 그 역사를 내게 가르쳐주신 아버지가 이 봄날 누구보다 더 간절히 생각난다. 따스한 햇살 아래 산소에 가서 차 한 잔 정성껏 올리며 그때의 말씀들을 새록새록 기억해 본다.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해
자꾸만 눈시울이 적셔진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내게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올곧은 눈과 가문의 긍지를 심어주셨다.
권력에 굴하지 않고 인간의 도리를 다한 엄흥도와 가문의 의리를 지킨 송시열 선생을 우리 시대의
진정한 위인으로 평가하고 싶다.
영월 단종대왕의 이야기가 다시 화제가 되는 오늘,
나는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아버지의 음성을 꺼내어 본다. 브런치의 하얀 여백 위에 가문의 유산인 이 뜨거운 충절과 인연의 기록을 정성껏 새겨
오늘 나만의 넷플릭스를 만들어 영상 해본다
그중에서도 내 가슴에 깊이 새겨진 이름은 단종대왕과 그를 지킨 영월 엄 씨 엄흥도였다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하던 시절 영월 호장 엄흥도는 홀로 어린 임금의 시신을 등에 업고 산길을 헤매었다
"봄날의 산소에서 올리는 茶한 잔"
50년 전 그 역사를 내게 가르쳐주신 아버지가 이 봄날 누구보다 더 간절히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