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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토프 Sep 04. 2024

거래인가 선택인가

만덕의 중년기

"빠른 판단 맘에 드네. 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따라와 주기만 하면 될 거야"


"학비는 확실히 책임져 주시는 거죠?"


"그럼~ 계약서라도 쓸까? 확실히 해두자고. 나도 그 편이 좋으니까. 뭐 다른 요구사항은  없니?"


"동생들이 몰랐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일어나는 일 모두요. 둘이 타지에서 살다가 아이 낳고 나서 이 집에 다시 들어왔으면 해요. 저는 운 좋게 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걸로 동생들이 알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거기서 만난 사람과 아이 낳고 한국으로 들어온 걸로 그렇게요. 동생들 학비도 저희 집을 딱하게 여긴 누군가의 장학금 정도로 여겼으면 좋겠고요."


"그래, 뭐 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


만덕은 집으로 돌아와 동생들에게 집안일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마냥 어린아이는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하나하나 차근차근 가르쳐나갔다. 그리고 한 달 뒤 만덕은 동생들을 남겨두고 타지로 떠났다. 타지에서의 삶은 의외로 복잡할 게 없었다. 만덕의 남편은 오히려 홀가분해 보였고, 술을 마시는 횟수도 줄었다. 둘이 대화하는 횟수도 늘어갔다. 한 동네에서 살며 혹시라도 이상한 소문이라도 동생들 귀에 들어갈까 싶어 타지에서 지내기로 한 것이 만덕의 남편에게 오히려 득이 되었다.


"다른 사람 같네요. 오늘 유난히 더."


"그러게. 집 나와서 부모님 얼굴 안 보고 잔소리 안 듣고 눈치 볼 거 없으니 숨통이 트여. 독립이 필요했나 봐. 왜 진작 그 집에서 탈출할 생각은 못했던 걸까. 시도는커녕 생각도 못했어."


"이제 좀 어른처럼 보이네요. 우리 아이는 언제 가질까요?"


"넌 두려운 게 없나 봐?"


"두려웠다면 그날 찾아가지 않았겠죠."


"그렇네... 나는 아직 두려워. 나 자신도 책임지지 못했는데, 내 자식을 책임질 수 있을까?"


"책임이요. 시부모님도 당신 삶을 책임지시려고 해서 이렇게 된 거 아닐까요? 반대로 하면 되죠. 아이가 커가는 동안 우리는 도와주는 사람인 거고, 아이가 크면 스스로 책임져야죠."


"나보다 더 어른 같은 소릴하네?"


"저희 부모님은 절 그렇게 키우셨거든요. 제가 이런 선택을 했지만... 이건 거래가 아니라 제가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여러 가지 것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거래였다면 내가 너무 가여울 것 같아요."


만덕의 남편은 만덕과 지내면서 처음으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의 말대로 그 남자가 철이 든 걸 지도 모르겠다. 그 둘은 시간이 흘러 거래가 아니라 여느 평범한 부부가 되었고, 그토록 필요했던 건강한 5대 독자를 출산하게 되었다. 동생들에게는 유학 가서 만난 사람과 인연이 닿았노라 알렸고, 그들의 비밀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이대로 아이 잘 키우고 살면 되는 거야. 저 사람도 예전 같지 않고, 내가 잘하면 될 거야. 해보자.'


만덕은 시댁에서의 삶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아이를 먹이고 돌보는 일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이가 크고 걸음마를 하고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날 무렵, 아이의 아빠는 또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왜 그래요? 뭐가 이렇게 힘든 건대요?"


"보기만 해도 이렇게 좋은데... 우리 부모님은 나한테 왜 그러셨을까? 왜 단 한 번도 내가 좋아하는 걸 그냥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까? 왜 답이 항상 정해져 있었을까? 왜 항상 자식을 이기려고만 하셨을까? 날 사랑하긴 하셨을까?"


아이의 아빠는 아이가 커갈수록 무기력해져 갔다. 계속 자신의 부모를 탓했고, 항상 술에 취해있었으며, 매일 후회했다. 그러다 결국 자신의 삶을 끝내기로 정했다. 그렇게 만덕은 아이와 둘이 남았다. 아이의 할머니는 아들을 잃고도 변하지 않았고, 손자가 자신의 아들인 양 키우기 시작했다. 만덕이 나서려고 하면, 동생들에게 모든 것을 알리겠다며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단 하나의 실패도 경험해보지 못하도록 단 한 번의 좌절도 느끼지 못하도록 할머니는 아이의 앞날을 만들어갔다. 손자는 자가용을 끌고 다니는 대학생이 되었고, 대학 졸업 후 할아버지 사업을 이어받기만 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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