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곱 살. 내 자식에게도 이 정도의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게 해 줄 수 있을까 싶었던 그때로 돌아왔다. 작아진 손과 발 삐쩍 마른 몸. 내 옆에서 자고 있는 동생. 그리고 내가 가지고 놀던 인형들. 나는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려 화장실로 향했다. 다행이다. 아직 내 머리는 꼬불거리지 않았다. 엄마가 날 미용실로 끌고 가기 전인가 보다.
"수정아 왜 벌써 일어났어~! 오늘 일요일이잖아. 얘가 아침부터 거울을 왜 이렇게 봐~"
"아 맞다 오늘 일요일이지."
일요일. 뭘 했더라. 7시였나, 8시였나 놓치지 않고 보던 만화가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 내손으로 티브이를 켰다가는 아침부터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방으로 돌아갔다. 동생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방을 둘러보며 기억을 되살렸다. 작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2층짜리 인형집, 바이엘 교재, 수학 학습지, 종이 인형.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다 사주던 아빠덕에 얻어낸 인형집. 그 시절, 우리 집의 겨울은 크리스마스트리는커녕 산타할아버지의 존재여부도 중요하지 않았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엄마, 아빠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가서 장난감을 직접 고르게 했다. 뭐든지 나와 반대였던 내 여동생은 기어코 내 인형집보다 훨씬 큰 변신로봇을 골랐었다. 그리고, 7살이 되자마자 엄마는 나를 피아노학원에 보냈다. 학원가는 길에 파는 달고나는 마론인형보다도 탐나는 존재였다. 나는 너무 어렸고, 용돈이 없었다. 지나가다 만난 같은 학원 언니들이 나눠주는 달고나 몇 조각은 일곱 살이었던 나에게 달면서도 쌉싸름한 어른의 맛 같았다. 국자를 들고 멋지게 젓가락을 저어가며 달고나를 능숙하게 만드는 언니들이 너무나 커 보였다. 거기다가 우리 애들도 해 본 적 없는 학습지를 나는 7살이 되자마자 풀어내야 했다. 몇 번 하다 보니 문제를 풀 필요도 없었다. 더해지는 숫자가 1 커질수록 답도 1씩 커지고, 빼지는 숫자가 1씩 커지면 답도 1씩 작아지는 식이였다. 한 페이지를 푸는데 5초면 충분했다. 내 잔머리는 학습지를 풀 때만 발동했다. 분수가 나오면서 이 잔머리는 쓸모 없어졌지만, 꽤 오래 써먹었던 방법이다. 그리고 나는 세뱃돈을 받으면 전부 엄마손에 뺏겼고, 겨우 얻어낸 백 원으로 종이인형을 샀었다. 예쁜 것들을 참 많이 좋아했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내 취향을 묻지도 않고, 미용실로 데려가서 엄마도 하지 않는 정수리에서부터 뽀글거리는 파마를 시켰었다. 원래 내가 이 시간으로 돌아온 이유는 내 파마머리 때문이 아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를 잊을 만큼 훙분해서 이번에는 절대 미용실에 끌려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밥 먹자~"
나는 익숙한 듯 수저를 놓고 엄마가 퍼다놓은 밥그릇을 옮겼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밥그릇이 뜨겁다. 나이 먹고는 행주 없이도 잘만 잡던 밥그릇이었는데. 그나저나, 오늘도 내가 콩을 먹는 건지, 콩이 나를 먹는 건지 모를 콩밥이다. 엄마는 매일 콩밥만 했다. 까만 서리태콩이 듬성듬성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 좋으련만, 쌀까지 전부 보라색으로 만들 정도의 두께로 콩을 덮어서 밥을 했다. 어쩌면 이 콩밥 때문에 엉엉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결혼하고 나서 내손으로 밥을 짓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검정콩을 내 밥솥에 허락하지 않았다.
"뭐~해. 먹어."
깨작깨작 오랜만에 먹는 콩밥이 반갑지 않아서 한 숟가락에 한숨 한번 쉬었다가 바로 엄마의 주먹이 날아왔다.
"아!"
"이럴 거면 먹지 마! 어디서 한숨을 쉬어. 밥 먹는 것도 힘들면 죽을 때가 된 거랬어. 콩이 얼마나 영양이 좋은데, 어? 감방 가면 콩밥 주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순간 고민했다. 이대로 밥을 먹을 것 인가. 박차고 일어날 것인가. 고분고분했던 나를 한번 버려볼까 한번 대들어볼까.
"콩도 적당히 넣어야지. 쌀이 백미인지 흑미인지도 모르게 될 정도로 넣잖아! 뭐든 적당한 게 좋은 거야. 우리 집이 감방도 아니고 감방보다 이것저것 잘 먹고 있으면서 왜 계속 콩밥만 주는 건대!
"그건 그렇지. 수정이 말이 맞아. 당신이 과하긴 해. 미역국도 국물이 안보이잖아."
옆에 있던 아빠가 한마디 거들었다.
"닥치고 주는 대로 처먹어!"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주는 대로 처먹는 게 우리 집 식탁문화였다. 눈물이 흘렀다. 침을 꿀꺽 삼켜도 입에서 엉엉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꾸역꾸역 밥을 먹고 방으로 들어왔다. 여길 내가 왜 돌아온 걸까 생각해내야 했다. 계획을 세워야 한다.
"수정아~ 아빠 어제 월급 받았으니까 이따 저녁에 돼지갈비 먹으러 갈까?"
돼지갈비라니.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인생 돼지갈비를 다시 맛볼 수 있게 되었다. 한 달에 한번 아빠의 월급날이 되면 연탄불에 석쇠를 위아래 뒤집어가며 구워주는 돼지갈비를 먹으러 갔다. 뼈를 이어 붙여 만든 거대한 고깃덩어리가 아닌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진짜 돼지갈비였다. 돼지갈비를 먹고 산책을 핑계로 동네를 돌면서 정보를 얻기로 했다.
"집에서 해주는 밥은 그렇게 안 먹으면서 돼지갈비를 혼자 5인분이나 먹냐? 대~단하다."
잘 먹고 나와서 또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다. 여기로 한참 가다 보면 아빠회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아빠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아빠, 아빠회사 여기로 쭉 가면 있는 건가? "
"응 저~기 다리 건너면 너 다니는 유치원이고 저기서 조금 더 가면 아빠회사야."
"맨날 차 타고만 가서 걸어가니까 어딘지 모르겠어서."
"배도 부른대 걸어서 다녀와볼까?"
"응~"
아빠가 내 손을 잡고 걷는다. 언제 잡아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빠손이다. 너무나도 어색했지만 나는 일곱 살이니까 아빠손을 꼭 잡고 걷는다. 엄마, 아빠는 자주 싸웠다.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 중에 엄마의 말투가 10%라면 90%는 술 때문이었다. 엄마의 지분 10%도 어쩌면 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기로 돌아온 것도 술 때문이다. 월, 화, 수, 목, 금 중에 아빠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은 거의 없었다. 아빠는 거의 매번 우리가 자고 있을 때 들어왔고, 술 취한 목소리가 들리고, 엄마의 고함소리가 들리면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아침에 일어나면 아빠는 없었다. 해보고 싶었다. 여기서부터 꼬인 아빠의 인생도 바뀌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