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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로시 Feb 02. 2023

꺾이지 않는 마음보다 중요한 마음

삶이 꺾일 때 살아갈 수 있는 힘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 유행하는 말이 나에겐 영 낯설었다. 내가 시대에 뒤처지는 것도 있겠지만, 이유 모를 반발심. 왜냐하면 내가 살아야지 마음먹었던 순간은 늘 "꺾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수없이 수만 번 꺾였을 때 비로소 나는 살고 싶었다.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죽고자 시도를 했을 때, 나는 완전히 꺾였고,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침이 오는 것이 너무 두렵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경험해야 했던 끔찍한 감각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잠이 들 때마다 내가 내일 눈을 뜨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소원은 늘 배반한다. 일어나서 주구장창 폭식과 구토만 반복해야 했던 삶은 끝나지 않던 저주였고, 살아 있는 것이 고통이 되었기에 그럴 때마다 살 희망이 꺾였다.

그나마 사랑해서 붙들고 있던 것마저도 꺾였을 때 더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스스로 죽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차곡차곡 모아 왔던 알약들을 두 손 한가득 움켜쥐었다.


약들이 모였다, 모여진 약들은 내 마지막 순간을 함께했다. 몇 번이고 알약을 털어 넣던 나. 약을 많이 먹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식이장애 덕분에 생긴 장기(?)는 변비약도 100알씩 한 번에 삼켜 넣는 것이었으니.

그렇게 약을 과다복용한 채,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이 쓰인(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가장 좋아하던 모습으로 남고 싶었다.) 티셔츠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내가 눈을 딱 감으면 그 뒤로 나의 삶은 더는 이어지지 않을 거란 믿음으로. 이 저주를 끊어낼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였다.

계속 먹어야만 하는 저주를 끝내야만 했다. 끝이 나지 않는 고통이 끊기는 순간이 있어야 했다. 꺾이지 않는 마음으론 대신할 수 없던 밑바닥을 나뒹굴던 삶이었으니까. 

결국 끝내지 못한 나에게 그 뒤의 기억은 없다. 내가 들었던 이야기로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살았지만, 이틀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순간이 나에겐 또 한 번의 완전히 꺾인 순간이다. 내 삶이 꺾였던. 약을 전부 토하고, 살아난 건 절망스러웠지만 죽은 듯이 깨어나지 못하는 내 곁에서 부모님이 울었다고 했다. 삶이 완전하게 꺾였을 때, 삶을 놓았을 때, 죽어야만 살 수 있었던 때 비로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보다도, 꺾여도 살아갈 수 있는 마음. 꺾인 채로 살아가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꺾이지 않으려고 애써도 삶은 내게 가혹했다. 세상은 나를 뚜드려 패곤 했다. 그렇지만 꺾인 채로 겨우 살아내야 했던 삶에서 나는 다시 살 수 있던 힘을 내곤 했던 것 같다. 



꺾인 채로 살아가는 마음

그러던 중에, 일어서다가 그만 발목이 꺾였다. 발목이 꺾이는 순간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발목 인대가 늘어났고, 깁스 대신 보조기를 끼고 생활하게 되었다. 꺾인 발목(?)으로 살아가는 삶은, 이전에 누렸던 모든 것에 대한 감사를 깨닫게 했다. 제대로 걷지 못하고, 절뚝거리며 걷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회사를 출근하는 것도 어려워서 3일 동안은 누워만 있었고. 출근을 하게 된 날부터는 이전보다 일찍 출근을 나서야만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걸어서 10분 거리를 20분 동안 힘겹게 걸어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저절로 퇴근시간도 늦어졌고, 절뚝거리는 발목으로 가기엔 모든 곳이 멀기만 했다. 실외배변을 하는 뭄이를 위해 매일 산책을 해야 하는 내겐 산책마저도 버거운 일이었다. 발목을 질질 끌면서 산책을 겨우 했다. 

발목이 꺾이고 나도 생활은 계속되어야 했다. 절뚝거리면서라도 출근을 해야 했고, 강아지 산책도 시켜야 했고, 집안일도 해야 했다. 모든 삶은 계속되었다. 꺾인 채로 이러한 삶을 적응해 나가는 건 몸도 맘도 힘들었다. 꺾인 발목으로 사는 삶의 경험은 꺾인 채로 살아가는 것을 실제적으로 살아내는 것이었다. 한 번 늘어난 인대는 취약해져서 부상이 잦고, 치료도 어렵다고 하는데. 꺾였던 발목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앞으로의 삶은 보호해야 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꺾인 마음을 돌보며 사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탱하던 너마저 꺾여 버릴 때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발목이 많이 아팠다. 발목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발목이 시리고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신기하게도(?) 이번에 꺾인 발목은 그동안 아파했던 오른쪽 발목이 아니라 왼쪽 발목이었다. 왼쪽 발목은 나름 튼튼하고, 건장해서 오른쪽 발목처럼 속을 썩이지 않았는데. 힘없는 오른쪽 발목이 다친 것이 아니라 왼쪽 발목이 일어서다가 다친 것은 너무 의아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아픈 오른쪽 발목대신 삶을 지탱하고, 버텨주던 왼쪽 발목이 너무나도, 많이 힘들었구나. 실제로도 오른쪽 발목이 힘이 없다 보니 왼쪽 발목에 모든 체중(힘)을 가해서 왼쪽 발목이 꺾인 것 같았다. 꿋꿋하게 내 몸을 지탱하던, 한 번도 아프단 소리 못하던 왼쪽 발목이 꺾이고 나니.

괜찮은 줄로만 알았지만, 사실 괜찮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프다고 하는 이곁에서 삶을 지탱하고, 도와주는 이들도 괜찮지 않고, 살고 싶지 않다고 하는 나를 버텨주는 가족들도 괜찮지 않겠구나.

겉으로 괜찮아 보여도 실은 괜찮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또 느꼈다. 온전하게 나를, 내 삶을 지탱해 주던 것들이 꺾일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어쩌면 꺾여야 너도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는구나. 네가 많이 버티고 있었단 걸 생각하게 되는구나 싶다. 삶을 온전히 지탱해 주던 것들이 아프진 않은지, 힘겹지는 않은지 돌보아야 하는 것 같다. 

절뚝거리는 발목과 함께 하는 삶은 괜찮지 않다. 생활도 힘들고, 몸이 아프니 마음도 덩달아 아프다. 움츠러드는 몸과 마음은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또 절뚝이며 가야 하는 삶이 있으니.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라도 쉬게 해 주고 늘 자신의 힘으로 지탱해야 했던 왼쪽 발목이 보조기에 기댈 수 있게 해주는 것. 너도 기대서 가도 된다고 이야기 해주는 것.

때론 지탱하던 것도, 지탱받아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꺾임으로써, 아프다고 증명하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


꺾였지만, 살아야겠지.

아픈 오른쪽 발목이 꺾인 왼쪽 발목을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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