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가족의 옆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세상과 나는 물과 기름처럼 열심히 섞어놓아도 이내 곧 분리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시작한 것은 7살 무렵이었다. 나의 어린시절을 가만가만 돌이켜보면 여느 가족과 다름없는 일상을 보낸 것 같은 기억의 잔상이 있는데 사춘기를 지나고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나아갈 때에도 가볍다는 느낌보다는 신체 한쪽이 자꾸만 땅에 끌리는 것 같은 불균형한 느낌이 있었다.
친정 엄마와 친정아빠는 사이가 좋지 않으셨다. 난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고자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최선을 다했다. 엄마와 아빠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가족이 본격적으로 분리가 되어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그것을 막으리라 하루에 내게 주어진 에너지의 대부분을 어머니와 아버지의 생각과 느낌을 읽어내는 데에 쏟았다.
불안하다 이야기를 하면 니가 걱정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라고 일축당했고 불안을 언어로 잡아낼 수 없는 날에는 온몸으로 불안을 표현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내게 찍혀진 것은 얘 또 유난떨고 있다는 낙인이었다.
보험 영업을 하시는 엄마는 아빠와 의견이 대립될 때마다 일을 이유로 밖으로 도셨고 아빠는 큰딸인 나를 잡고 '네 엄마란 사람은 말이다'라는 말로 하소연을 하셨다. 안에 쌓여가는 감정은 오갈데 없이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는데 부모가 알아주지 않으니 나 또한 내 감정을 들어 샅샅이 파헤쳐야할 만큼 가치있게 여기지 않았다. 순환되지 않고 켜켜이 쌓여만 가는 감정에서 썩은내가 진동할 때 쯤 동생에게 가학적 행동을 시작했다. 무엇을 하면 되고 무엇을 하면 안되는지에 대한 기본 개념도 없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자기 감정을 필터링 없이 내지르는 아버지 어머니를 보며 감정을 다룬다는 것은 차오르는대로 왈칵 쏟아버리거나 막무가내로 참아야하는 어떤 것 쯤으로 여겼다. 동생의 머리를 내리박거나 몸을 발로차거나 꼬집거나 언어적으로 모멸감을 주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와 동생 둘다 중학교에 다닐무렵 동생의 선생님이 우리집을 방문하셨다. 동생은 아직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집에는 엄마와 나 둘뿐이었다. 무언가 짐짓 심각한 이야기를 하시는것 같더니 말씀을 다 마치신 후에 집으로 돌아가실 무렵 선생님과 나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내게 포근한 웃음을 짓고 가시던 선생님을 끝으로 동생에게는 우울증 약이 손에 들려졌다.
하지만 바뀐 것은 손에 들려진 동생의 약 뿐이었다. 아빠는 그 즘에 살고 있던 집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직장을 잡으셨고 주말에 한번 집에 오시는 이른바 반쪽짜리 기러기 아빠가 되었다. 그 때,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는데 엄마가 어느 아저씨를 집으로 데려오시더니 아빠의 방을 내주며 세를 받아 살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사전에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가 아닌 거의 통보식으로 이야기를 하니 사춘기를 막 접어들고 있는 내 마음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엄마한테 저 아저씨가 왜 우리집으로 와서 아빠의 방을 써야하는건지, 내가 얼마나 당황하고 불편한지에 대해 아무리 이야기 해보아도 돈이 부족해서 월세라도 받아서 나는 생활해야겠다는 엄마의 논리 앞에서는 나의 이야기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빠는 이런 상황을 알고 있을까? 아빠가 내게 안전한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런 기막힌 상황을 결국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속으로만 끙끙 앓았고, 그 아저씨가 3개월 정도 우리집에서 생활하다가 나가게 될 무렵에 아빠가 이를 알고 엄마와 크게 언쟁을 했다.
초등학교 4학년때의 기억이 있었다. 서점에서 책을 한권 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같은 반 남자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 남자아이 옆에는 자신의 형, 엄마, 아빠가 있었는데 네사람 모두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가던 길을 멈춘 채 그곳에서 붙박인 듯 서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있는 안방으로 가서 우리는 왜 가족들끼리 손에 손잡고 어디한번 가지를 못하느냐 하며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아무말 없이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것을 나는 엄마가 나의 마음을 알아준걸로 알았으나 시간이 지남에따라 엄마의 포옹은 미안해, 하지만 엄마도 어쩔 수가 없네 하는 말이었던 듯 싶었다. 서로를 향한 비난과 멸시는 포옹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방치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방치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난잡한 집안에 부모는 오간데 없고 밥도 못 빌어먹은 꾀죄죄한 어린 아이 혼자 손을빨며 초점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내가 방치를 당한거라고? 때되면 밥을먹고 꾀죄죄한 옷을 입은적도 손에 꼽았다. 물이새는 집에서 산것도 아니었고 기본적인 배움의 기회도 박탈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장하는 내내 '나는 누구지?'라는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내 영혼이 나의 육신을 입고 하루를 살아가는데 마치 내가 허공에 떠있는것처럼 현실감각이 전혀 없고 내 몸이 내 몸이 아닌것 같은 이질적인 감각을 등에지고 살아갔다.
감정이란 헤아리고 알아차리고 놓아주는 것이라고 알려주는 이가 없어서 방치하고 외면하니 외로움이 밀려왔다.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날에는 괜히 가만히있는 동생을 더 건들였다. 누군가와 강하게 연결되고 싶은 날에는 동생을 괴롭히며 연대하는 느낌을 얻었다. 내가 방치당하고 있는 그 이상으로 동생은 어린시절내내 방치를 당했다.
동생이 반기를 서서히 들게 된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이었다. 부부간의 갈등이 최고조로 다르면서 형제갈등도 함께 최고조로 달했다. 동생은 그동안 쌓인만큼 감정을 터뜨렸다. 가족이 무너진다는 것 외에 달리 이 상황을 표현할 말이 없다. EBS에서 가족 전 구성이 상담을 통해 개선되어지는 사례를 보았다. 엄마를 앉혀놓고 가족상담을 받아보자고 권유했다. 엄마는 나는 정상이니 받을거면 너희들이나 받으라고 하셨다. 시도를 하고 제안을 해보아도 추진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어느순간 삶은 이렇게 썩은내가 진동하는 공간에서 불편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거라고 여기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동생은 입대를 하였고 나는 취직을 해서 집과는 멀리 있는 곳으로 발령을 받아 일을하였다. 그 시기에 아빠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본인이 암 판정을 받았노라고 이야기했다. 직장 수습기간에 아빠의 '암 판정'은 나를 주저앉혔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가 말한것이 사실이냐고 되물었다. 엄마는 왜 자기 아픈걸 공연히 이야기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를 심란하게 만들었느냐고 외려 화를냈다. 슬퍼해야하는건지 정말 엄마 말마따나 왜 꼭 지금 알렸어야 하는건지에 대해 아빠에게 화를 내야하는 건지 싶었다.
같은 의견을 두고 견해가 다를 수 밖에 없는것은 이해한다싶다가도 너무나 극명한 차이를 보이니 삶에 대한 어떠한 메뉴얼과 기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항상 평행선만 달리던 두분의 관계는 엄마가 2018년에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로 쓰러지시게 되면서 일단락 되는듯했다. 뇌출혈로 인한 후유장애로 엄마는 언어장애와, 인지장애, 우측편마비가 생기셨다. 엄마가 쓰러지시고 난 뒤에 동생의 증상이 더 심해졌다. 짜증을 내는 빈도수가 더 많아졌고 감정이 극으로 치닫는 횟수가 많아졌다.
엄마가 쓰러지실무렵 뱃속에 있던 둘째아이가 태어나 육아에 정신이 없을 무렵 동생으로부터 더이상 감정을 참아내며 살기가 버겁다고 내게 하소연했다. 내 두눈은 당장 팔랑팔랑 뛰어다니는 첫째아이와 꼬물거리는 둘째아이를 바라보았지만 머리 한구석 내내 엄마와 동생이 번갈아 증발되어 날아갈것만 같은 두려움에 집중되었다.
해결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으나 손도대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낸 것이 36년이다. 어느덧 나는 초등학교4학년 시절 엄마를 붙잡고 왜 우리가족을 그럴 수 없어? 하며 울며 하소연했을 때 같이 해나가보자라는 말 대신 몸으로 미안해 그런데 엄마도 어쩔 수가 없어, 나도 어떻게 해야되는지 잘 모르겠거든 하던 엄마와 같은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무너지는 동생을 보며 이제 니가 앞가림을 해야하지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굴거니 하며 알아서 잘 하겠거니 외면하거나 등돌리는 선택을 하고 싶지 않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 앞으로 한발자국이라도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더이상 같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한발자국씩 내 딛는 과정을 드러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