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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vvyPecanPie Dec 15. 2023

논문과 주머니

석사 수료생이 맞이한 어떤 순간

이번 글은 2021년 3월 28일 괴로운 석사학위 논문 작성 중에 쓴 글입니다.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


논문작업을 하다가 저녁을 간단히 먹고 돌아오던길에 책상으로 바로 가기 싫어서 교보문고를 들어갔다. 

박완서 작가님의 에세이 신작이 나온 것을 보고 그림도 너무 예쁜 아크릴 풍경에, 글감도 물론 감동적이고, 앗참! 네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작가는 박완서였지! 하는 생각도 하고, 해서 그것을 집으려다가. 옆에 있는 검은 밤 하늘 표지의 책을 발견했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천문학을 박사까지 전공한 젊은 연구원의 책이었다. 최근 유퀴즈에서 천문 사진을 찍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도 해서, 오호 하늘에 대한 이야긴가? 하고 책을 펼치는 순간,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글자 사이사이 대학원, 연구실, 교수님(그것도 귀여운 교수님), 랩미팅 등등의 대학원 용어를 보는 순간 '아, 이거 내가 읽어야겠다.' 했다.


대학원생때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 공부란 무엇인가에 이은 나만의 대학원 3부작을 만난 느낌이다.

저자는 천문학의 얘기는 중간중간의 배경 소재로 가져왔을 뿐 천문학에 대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는다. 더구나 칼 세이건의 대작 코스모스에 대한 장기하식 유머를 곁들인 비판도 한다.(그래서 뭐, 그거 안읽었다고 무슨 상관이야?)


그녀의 대학원 얘기를 들으며 친한 박사 언니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듯, 글자 하나하나에 오래 머무르기도, 웃음을 참을 수 없기도 하면서, 적나라한 대학원 얘기가 뒤에 나오진 않을까 긴장하면서 마치 추리소설을 대하듯 책장을 넘겼다.


대학원은 그렇다. 내가 느낀 대학원은 조금 신비스럽고 외롭고 독자적이고 그렇다. 우리만 아는 어떤 것이 있어서 외부 사람들과 터놓고 공유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것을 다 설명해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더욱 이상한 것은 대학원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도 어떤 때는 별로다. 그냥 내 힘듦을 자꾸 말하게 되는데 반복해서 말하는 것도 싫고, 싫지만 자꾸 얘기하고 싶어하는 요상한 마음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무튼 대학원 얘기는 그래서 혼자만 생각하지 누군가와 나누는 적이 잘 없는데, 앞서 본 대학원 2부작에 이어서 이 책에서 위로를 받았다. 그녀와 나는 동시적으로 대화하지 않지만, 오 정말 그래요 ㅠㅠ 맞아요 ㅠㅠ ㅋㅋㅋㅋㅋ 너무 웃긴거 아닌가요?, 하면서 밑줄치고 마스크 안에서 맘대로 웃고(이럴때는 마스크 쓴 게 다행이다) 하며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느낌이다. 마치 나만 아는 최애 연예인을 찾은 느낌. 이 책이 베스트 셀러 매대에 있었지만 음 내가 공감하고 뚫어지게 보고, 보면서 생각에 잠겼던 문장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과 고통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면 알기 어려울 것이란 느낌. 그래서 더 소중한 느낌이다.


그녀는 첫 장에 ‘수료생. 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이수했지만 졸업은 언제 할지 아무도 모르는 사람(너무 내 얘기 공감 천만개) 지금이라도 그만두어야 하는거 아닌가. 너무 늦었나. 그렇게 생각할 때가 가능 빠른 때인가. 나중에 분식집이라도 차리려면 심박사수료생 떡볶이는 안되니까 졸업을 해야 하나(두고두고 웃긴 부분).’라고 적었는데 심장이 벌렁벌렁하면서 웃기고 웃프고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게 반갑고 해서 그 곳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또, 그녀의 귀여운 지도 교수님 이야기와 대학원 수업 이야기들. 나도 아는 경희대 주변 식당 이야기. 시간강사를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 학부생들에게 정성껏 답변을 해준 그녀의 답장들 모두 좋았다. 나도 그녀의 따뜻한 메일을 받아보고 싶어 메일을 보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열람실이 10시에 마감되므로 정신없이 책을 읽다 내려놓고, 하던 분석을 마저 하고, 집에 돌아가면서 '후 이 책까지 가방에 넣으면 무거울 텐데 어떡한담' 하다가 손에 들고 가야겠다 싶어서 채비를 마치고 일어났는데. 글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이 내 코트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갔다. 혼자 웃기고 그 상황이 귀여웠다. 주머니에 책을 넣다니! 처음 해보는 경험인데 아마 남들도 그런적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언제나 성나 있는 내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전할 사람이 없어 아쉬워 하며 '그래 나한테나 얘기해주자 밀라논나 할머니가 자신이랑 연애하자고 했자나' 하는 무의식의 생각을 했다. 

진짜로 코트 주머니에 쏙 들어간 책


이 신기한 발견이 더 재밌어진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에 주머니를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 생각해보면 주머니가 1등으로 좋다. 나는 주머니를 사랑해서 옷을 사러 갈 때면 바지에 주머니가 편한지, 겉옷에 주머니에 손이 쏙 들어가는지부터 살핀다(최근에 새로 산 핸드폰도 바지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작은 사이즈를 샀고 그립톡도 붙이지 않는다. 주머니에 안 들어가니까). 주머니는 너무 편리하다. 항상 필요한 핸드폰, 지갑을 가방에서 꺼내지 않고 바로바로 넣다뺐다 할 수 있게 해 주고, 가끔 무안한 내 손도 숨겨주고. 긴장했을때 주머니 안에서 손을 꽉 쥐기도, 차가운 내 손을 녹여주기도, 욕하고 싶을 땐 그 사람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도 펼 수 있게 해주고 생각해보니까 주머니는 나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던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새로운 발견이라 계속 곱씹고 생각해보고, 나만의 비밀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신비스러운 느낌도 드는 동시에. 앞으로 다른 사람한테 내가 좋아하는 것 물으면 주머니라고 말해도 되려나? 하는 생각도 했다

(아마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연구실을 사랑하는 그녀처럼. 휴학을 해도 연구실에는 있었다는 그녀처럼. 연구실에 밤 늦게 혼자 남아 골몰할 시간이 행복하다는 그녀처럼. 외국 동료들과 메일을 주고받으며 Enjoy!를 마지막 인사말로 붙인다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보며 ‘얘는 골치아픈것을 던져주면서 즐기라고 한다니’하는 그녀의 지도교수의 입가에 핀 미소처럼. 나도 글을 쓴다. 언젠가 이러한 아름다운 얘기들을 세상의 다른 나에게 들려줄 수 있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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