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는 왜 재벌이 없을까 (비즈니스-1)

by 프랑스 읽어보기



삼성, 현대차, SK, 롯데, LG.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거대 기업집단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재벌’이라고 부른다. 기업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창업 가문이 지배권을 유지하며 여러 산업을 아우르는 그룹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의 급격한 산업화와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부의 집중, 세습 경영, 과도한 영향력 행사 등으로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어떨까. 프랑스에도 거대한 기업은 많다. 럭셔리 분야의 LVMH와 에르메스, 항공·방산의 에어버스, 사프란, 다쏘, 금융의 BNP파리바와 AXA, 제약의 사노피까지.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기업들이 곳곳에 있다.


하지만 한국의 재벌과 같은 형태의 ‘다산업 지배형 가족 중심 기업집단’은 찾아보기 어렵다. 일부 기업에 가족 영향력이 존재하긴 하지만, 여러 산업을 묶어 소유주 일가가 경제 전반을 지배하는 구조는 아니다. 프랑스는 그룹 중심 경제라기보다 산업별 챔피언 구조에 가깝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1. 출발점이 달랐다

한국은 근대 산업화가 늦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산업 기반은 거의 붕괴된 상태였다. 자본도, 기술도, 기업도 부족했다. 이 상황에서 국가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택했다. 성장 가능성이 있는 특정 기업에 자금과 정책 지원을 몰아주고, 이들이 다양한 산업에 진출하도록 장려했다. 한정된 자원을 빠르게 산업화로 전환하기 위해 몇몇 기업집단을 키우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형성된 기업들은 자연스럽게 여러 산업을 동시에 운영하는 구조로 성장했다.

반면 프랑스는 이미 19세기부터 산업화를 경험했다. 20세기 초에는 금융, 제조, 인프라 등 다양한 산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본도 축적되어 있었고, 산업별로 전문 기업들이 존재했다. 굳이 하나의 그룹이 여러 산업을 동시에 묶어야 할 필요가 크지 않았다. 식민지 네트워크와 유럽 시장이라는 외부 기반도 존재했다. 출발 조건 자체가 달랐다.




2. 한국은 국가와 기업의 동맹이었다

한국의 산업화는 국가와 기업의 밀접한 협력 속에서 이루어졌다. 정부는 정책 금융을 통해 기업에 자금을 공급했고, 수출을 지원했으며, 규제를 완화해 대기업 중심 성장을 촉진했다. 기업은 이에 맞춰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고용을 확대했다. 국가 주도의 은행 시스템과 수출 중심 정책은 자연스럽게 특정 기업집단에 자원을 집중시키는 구조를 만들었다.

프랑스는 조금 달랐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업(전력, 철도 등)은 국유화하여 직접 관리했지만, 민간 기업을 하나의 거대 그룹으로 키우는 방식은 택하지 않았다. 이미 발달한 금융 시스템이 존재했고, 기업은 은행과 자본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특정 기업집단에 금융이 집중되는 구조가 아니었다.




3. 사회가 기업 권력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랐다

한국에서는 산업화 시기 국가적 목표가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강한 성장과 수출 확대는 사회적 합의에 가까웠고, 대기업의 성장은 곧 국가의 성장으로 인식되었다. 정치적으로도 권위주의 체제가 이어지던 시기였기에 기업 권력에 대한 견제는 상대적으로 약했다.

프랑스는 다르다. 민주주의 전통이 일찍 자리 잡았고, 노동운동과 사회적 견제 장치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자본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에 대한 경계가 사회적으로 존재했다. 국가가 산업을 육성하되, 특정 가문이나 그룹이 경제 전반을 지배하는 구조는 용인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프랑스에 재벌이 없는 이유는 프랑스가 덜 자본주의적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출발 조건과 산업화 방식, 국가와 기업의 관계, 그리고 사회가 기업 권력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한국의 재벌은 특수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탄생한 구조다. 프랑스는 이미 산업별로 전문화된 기업들이 존재했고, 국가는 전략 산업을 직접 관리했으며, 사회는 자본 권력의 과도한 집중을 경계했다. 그래서 프랑스 경제는 ‘가문 중심의 다산업 그룹’이 아니라 ‘산업별 챔피언 기업’이 이끄는 구조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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