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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Jul 17. 2023

모든 바다엔 에머슨

  녀석이 종일 하는 일이라곤 모래를 이불 삼아 이리저리 뒹구는 것이다.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가,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여주더니, 조금 전부터 잠에 빠졌는지 꼼짝 하지 않고 누워있다. 다문 입에 콧수염이 귀엽다. 나이는 이제 겨우 삼 개월. 벌써 두 달째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는데도 몸매가 포동포동하다. 포만감에 젖어 세상에 부러운 것 없다는 표정이다. 마음은 아직 자궁 속인가. 어미를 그리는가. 그러다 먼 바다가 부르는 소리를 듣는가. 바둑알 같은 까만 눈을 번쩍 뜬다.   

  녀석의 어미는 멀지 않은 윗비섬(Whidbey Island)에서 4년 전에 태어났다. 퓨젯사운드 지역에서 코끼리 물범(Elephant Seal)은 희귀해서 어미의 출생은 과학자들과 봉사자들에겐 큰 기쁨이었다. 건강 검진을 한 뒤에 꼬리에 번호표를 달았다. 그리고 올 1월, 젊은 나이에 첫아들을 낳아 엄마가 되었다. 이 해변 잔디밭에서 출산하고 아들에게 영양과 지방이 풍부한 젖을 먹여 살을 찌웠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어미는 홀쭉해진 몸으로 먼바다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기는 이 해변에 홀로 남았다. 

  보우만 베이(Bowman Bay) 해변엔 인적이 드물었다. 오후에 비가 올 거라 했던 오보 때문이었을까. 비 오는 날의 바닷가 산책에 도전해보려고 나섰는데, 해변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해가 나왔다. 반원을 그린 듯 아늑한 베이의 양옆으론 바닷가 벼랑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었다. 인디언 히아신스가 피어오른 벼랑에 서니 봄 바다가 눈부셨다. 자궁처럼 아기를 품어주는 이곳 지형을 살펴보고 나서 최적의 자리를 알아보는 어미의 안목에 놀랐다. 

  자원봉사자들이 아기가 놀고 있는 곳에서 멀찍이 안전콘을 세우고 온종일 교대로 사람의 접근을 막고 있다. 보호뿐 아니라 교육의 역할도 함께 했다. 물범에 대한 상세한 지식으로 많은 질문에 일일이 답변해주니 고마웠다. 물범의 지방을 태워 불을 밝히거나 양초를 만들던 1900년도 초엔 멸종 위기에 놓였던 때도 있었다. 위기는 벗어났으나 아직도 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귀한 몸이다. 

  사람의 접근을 막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아기가 사람과 친해지는 것이 양편에 해가 되기 때문이다. 혹 사람으로부터 먹이를 공급받게 되면 야생성을 잃게 될 것이다. 4년 전 그의 어미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의 애정을 듬뿍 받았던 모양이다. 1,000파운드의 거구가 된 후에도 어미는 가끔씩 야영장이나 민가의 데크 위에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아기가 다 자라면 5,000파운드까지 나가는 거구가 된다니 녀석이 데크 위에 나타난다면 일어나게 될 일은 재난이 될 것이다. 상대를 존중하는 적절한 거리 유지는 서로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하다. 

  집에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봉사자에게 다가갔다. 저 아기, 혹시 이름이 있나요? 꽃이건 동물이건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 것은 그 존재에 대한 내 나름의 존중이다. 그럼요. 에머슨(Emerson)이에요. 그녀가 답했다. 마음이 바짝 녀석에게 다가선다. 이름으로 녀석의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어 기뻤다. 어미의 이름, 엘시메이(Elsie Mae)에서 E와 M을 따서 지었단다. 엄마의 형제들은 EL이 돌림, 아기의 형제들은 EM이 돌림이란다. 앞으로 여동생이 생긴다면 아마도 에밀리(Emily)나 엠마(Emma)가 되지 않을까? 항렬이 분명한 족보 있는 집안이다. 

  에머슨은 요즘 들어 가끔 바다로 들어가 수영을 연습한다. 아직 수영이라기보다는 물장난이다. 어린아이가 물에 처음 들어가 첨벙대는 일과 같다. 오롯이 홀로 미래를 준비한다. 먼 바다. 그 자유와 도전이 부르는 소리에 본능이 응답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건 아마도 배고픔을 느끼기 시작하는 시점일 것이다. 먹이를 쫓아 심해를 누비는 그를 그려본다. 

  이야기에 이끌리는 귀가 에머슨의 짭조름한 이야기엔 더욱 쫑긋 솟았다. 뇌는 이야기에 연결된 정보를 가장 오래 기억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바라보는 모든 바다엔 에머슨이 담겨있을까. 그 유연한 몸짓으로 그려낼 이야기로 바다는 더욱 눈부시게 일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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