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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Jul 17. 2023

멜빵바지

  두 돌 무렵 큰 아이는 멜빵바지를 그려달라고 조르곤 했다. 하나를 다 그리기 무섭게, 또! 하는 딸의 성화에, 모양과 색을 바꾸어가며 그려냈다. 여러 벌을 그려야 그 ‘또’ 소리가 멈추었다. 어느 날 전지를 사다가 방의 한쪽 벽을 다 가렸다. 그 하얀 종이 위에 딸과 함께 온갖 그림을 그렸다. 멜빵바지는 하늘로 날기도 하고 바다 속 물고기와 헤엄을 치기도 했다.  

  유아원 입학을 앞두고 딸이 좋아할 만한 옷을 골랐다. 빨강 스타킹에 노랑 칠부 멜빵바지를 입은 딸은 만족한 듯 반달 눈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딸에겐 하늘하늘 원피스보다 개구쟁이 스타일 멜빵바지가 더 잘 어울렸다. 그것을 잘 아는 듯 유난히 좋아하는 것도 신기했다. 이제 어른이 된 딸은 여전히 멜빵바지를 즐겨 입는다. 

  몇 해 전부터 나도 멜빵바지를 입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마도 잡지에서 본 한 장의 사진 때문일 것이다. 밀짚모자에 멜빵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농장을 배경으로 서있었다. 헐렁하고 소박한 그 옷과 어깨 너머의 배경이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들과 밭, 나무와 꽃들, 채소를 뽑아 든 사람, 어느 것 하나 내가 주인공이라고 나서지 않고 자연 속에 잘 스며든 풍경이었다. 농부가 아무 때나 걸치고 들로 나가면 제 몸이 하나의 작은 풍경이 될 수 있는 흙과 바람에 부대낀 옷이었다.  

  지난해 가을 어느 날 멜빵바지가 있을 만한 가게에 갔다. 가게 안에서 두 바퀴를 돌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포기하고 나오려다가 점원에게 물었더니 한쪽 구석으로 안내했다. 좁은 구석엔 꽃무늬 원피스 한 벌이 걸려있었는데 청년이 원피스를 옆으로 젖히자 그 뒤에 멜빵바지가 숨어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내게 딱 맞는 치수였다. 마당일을 할 때 입을 옷으로 찜해놓고 봄이 오길 기다렸다. 이제 막 길고 긴 우기가 시작된 때였다. 

  멜빵바지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뒷마당에 나서면 잘 어울린다는 말에 기분이 좋다. 바지에 흙이 묻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툭툭 털어 창고에 걸어두었다가 다음날 마당에 나갈 때 다시 꺼내 입는다. 

  지렁이가 반가워진 것은 뒷마당에 밭을 일구어 놓은 이 집에 이사 온 후부터였다.  물을 좋아하는 식물도 있고 굶겨야 잘 자라는 종류도 있다. 그늘에서 활개를 치는 꽃도 있고 해가 부족하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종류도 있다는 것도 배웠다. 심고 거두어 보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각 식물의 특성을 조금씩 손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먹거리나 애지중지하는 꽃, 그리고 내 몸도 흙에 뿌리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이젠 맨손으로 흙을 만지는 일에도 편안함을 느낀다. 아무래도 나는 농부가 되어가는 가 보다. 과연 농부라는 새 이름이 나의 마지막 정체가 될까?

  올봄 어머니날이었다. 수국 화분과 함께 작은 상자를 내밀며 딸들이 말했다. 이건 좀 재미있는 거. 선물이 재미있다니 과연 무얼까, 더욱 궁금했다. 포장을 뜯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연보라 바탕에 야구공만한 하얀 데이지가 가득 피어있는 멜빵바지였다. 마당에서 일할 때 입으세요. 고마워, 근데 어쩐지 마당의 꽃들이 놀라자빠질 것 같은 옷인데? 우리는 함께 깔깔 웃었다. 

  이제 여름이 지나가고, 백일홍이 지고 비가 겨울을 부를 때까지 멜빵바지 두 벌이 뒷마당에 서성일 것이다. 겨울비 내리는 창가에서 자꾸만 봄을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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