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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Jul 17. 2023

바람의 언덕

여행의 위로

  시간은 정말 예년과 같은 속도로 흐른 걸까? 지난 10개월 동안의 시간은 단조롭게 흘렀다. 꽃이 피는 아름다움도 낙엽이 지는 쓸쓸함도 그리 가깝게 느끼지 못했다. 자연에서 받았던 위로를 뒤로하고 올해는 더욱 골방으로 숨어들었던 날이 많았다.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코로나라는 한 계절이었다. 

  12월, 마지막 한 해의 수업을 온라인으로 마친 딸이 애초에 계획했던 외국여행을 할 수 없게 되어 낙심했다. “엄마,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요?” 고맙게도 내게 물었다. 조용한 통나무집이면 아무 데라도 좋겠다고 했다. 컴퓨터를 두드리던 딸이 예약을 마쳤다. 둘만의 2박 3일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언덕에 오르니 푸른 잔디밭 너머로 몇 개의 통나무집들이 보였다. 그 옆으론 결혼식장으로 대여하는 건물도 있었다. 언덕의 삼면을 두른 건 초로의 노인 같이 머리에 눈을 얹은 산들이다. 멀리 언덕 아래로 강의 윤슬이 떼 지어 태평양으로 흐른다. 오래전 과수원이었던 이 언덕은 이제 휴양지가 되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평생의 단짝이 될 사람과 반지를 나누어 갖고 누군가는 잠시 고요 속에 잠겼다 떠난다. 

  문을 여니 작은 부엌 겸 거실이 우리를 맞았다. 그 옆으로 욕실과 침실이, 계단을 오르면 나지막한 다락이 전부였다. 깨순이 로라 잉걸스가 나타날 것 같은 집이다. 주인이 미리 난로를 틀어놓아 집안은 훈훈했다. 무엇보다 나무라는 소재가 주는 포근한 기운이, 어서 와요, 온몸을 감쌌다. 인간이란 애초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 몸을 담을 이 정도의 거처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이곳의 이름은 바람의 언덕이다. 밤이 돼서야 그 이름의 뜻을 깨달았다. 바람이 지나가는 통로인지 밤이 깊을수록 바람이 윙윙 목청을 돋우며 울었다. 언덕은 온통 어둠과 바람의 차지였다. 원시로 돌아간 밤은 길었다. 각자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다 사이사이 둘 중 하나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대화가 시작됐다. 이렇게 울며 부는 바람처럼 시름도 쏟아 내버리고 다시 어린아이처럼 맑은 마음으로 이 언덕을 내려갈 수 있기를. 다시 이 언덕을 찾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바람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여러 달 동안 몸은 강제 휴식이었지만 마음이 지쳐 있었나 보다. 생각과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 이제는 언니처럼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끔은 따끔한 충고도 해줄 만큼 자라있는 딸과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가 좋았다. 이번 여행에서 내 마음의 가장 약한 부분을 딸에게 다 열어 보인 것 같다. 가끔 내 위주로 생각이 치우칠 때면 딸이 중심을 잡아준다. 딸의 눈을 통해서 나를 더 이해할 수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엄마도 나에게 힘들다고 말하고 싶을 때가 없었을까? 엄마는 지금 내 나이 때 아버지와 사별하셨다. 짐을 나누어 지지 못하고 홀로 그 이후의 삶을 사는 동안 한 번 쯤 무너진 모습을 보일 수도 있었을 텐데, 감사하게도 그런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엄마의 품은 따뜻하다. 그런데 엄마처럼 따뜻하게 품지 못하면서도 나는 요즘 딸들에게 안기고 있었다. 엄마는 외할머니 같은 할머니가 돼야 해. 딸이 오래전에 당부한 말인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눈물을 막 훔치는 아이처럼 빗방울이 후득후득 떨어졌지만 결국 방끗 해가 나왔다. 산책로를 따라 아침 산책을 했다. 오후엔 콜롬비아강을 따라 아담스산 근처 마을까지 드라이브를 떠났다. 강을 따라 겹겹이 산과 언덕이 이어졌다. 방향을 북쪽으로 바꾸어 강과 멀어질수록 건조한 광야로 바뀌었다. 가끔 회전초(tumbleweed)들이 바람을 타고 탱탱볼처럼 차도로 달려들어 심심치 않았다.  

  작은 마을에 닿았다. 마을 인구가 너무 적은 탓인지 그 흔한 패스트푸드나 스타벅스도 보이질 않았다. 고개를 들면 어디서나 보이는 흰옷 입은 아담스산이 의젓하게 마을을 품고 있을 뿐,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아무것도 없네. 실망한 듯 말하다 잠시 생각했다. 내가 원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한적함 그리고 말없이 우직하게 늘 거기 있는 산. 이런 마을에서의 일상은 어떨까? 가본 적 없는 곳에 이르면 늘 달아보는 이 질문을 다시 던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포틀랜드 맛집에서 샌드위치로 배를 채우고 시애틀로 출발했다. 운전대를 잡은 딸이 물었다. 엄마, 이번 여행에서 뭐가 제일 좋았어요? 음, 딸하고 같이 시간 보낸 거. 딸은 내 말에 감동한 듯, 대답이 너무 달콤하다며 호들갑이다. 황금 같은 시간을 엄마랑 보내준 딸이 기특해서 가만히 등을 토닥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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