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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Jul 17. 2023

두고가야 한다는 것

  해변에서 아이들은 즐겁다. 마음껏 뛰고 소리치고 달린다. 깔깔거리며 웃는다. 모래를 가지고 놀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파도가 다듬어 놓은 막대기나 깨진 조개껍데기도 멋진 장난감이 된다. 집, 성, 터널.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고 그 아래 제 이름을 쓴다. 뿌듯하게 바라본다. 

  시원한 바람, 쉴 새 없이 밀려들고 부서지는 파도 소리, 고래들이 목욕한 물비린내. 물새들과 그 가녀린 다리 아래 아른거리는 같은 수의 그림자들. 그리고 그림의 일부가 된 아이들. 바라보는 나의 마음도 아이들처럼 흐뭇하다. 신명 난 아이들을 바라보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해주고 싶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을 늦춘다. 

  아이들은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먼저 집에 가자고 말하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면 파도 소리에 묻힌 내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거나 몇 번 더 제 이름을 부를 때까지 버텨본다. 정말로 가야 할 시간이 오면 아쉬운 듯 만들어 놓은 것들을 잠시 바라보다 손을 털고 일어선다. 모래로 만들어 놓은, 부서질 것들은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두고 가야 한다는 것에 그리 개의치 않는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을 허파에 가득 담은 아이들이 헝클어진 머리로 파도를 등에 지고 내게로 달려온다. 순간, 한 장의 사진 속으로 시간이 멈춘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이마를 두드리는 내 머리카락 한 가닥뿐. 달려오는 아이들도 그 뒤의 하늘과 바다도 모두 멈추어 섰다. 나는 아이들이 되고 아이들은 내가 된다. 

  하늘 아버지도 나의 살아가는 날들의 분투를 대견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실까? 나의 흥겨움에 함께 기뻐하고 넘어졌을 때 응원하고 계실까? 나를 부르실 그날은 언제가 될까? 이제 그만 가자고 말하려 시계를 보고 계실까? 좀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더욱 의미 있는 일에 남은 시간을 드리겠다고 할까?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시간을 조금 더 보내고자 소환 연기 신청을 할까? 호흡을 허락받았던 시간을 감사하고 기쁨으로 갈 수 있을까? 간사한 나를 잘 알기에 그날의 내 기도를 예견하기 어렵다.

  노년이 되어 갈수록 관계의 폭이 좁아지게 된다. 허락된 만남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대가를 노년의 삶에서 치른다고 한다. 소유가 많을수록 떠나는 일이 고통스럽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누구나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업적이나 소유보다는 사는 동안 맺었던 관계에 더 집중하게 된다. 나를 지은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사는 동안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관계다.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가장 시린 아픔은 관계 속에서 온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을 무렵, 어느 조용한 오후, 나의 기도는 가보지 않은 길로 내달렸다. 남의 허물이 내 것이 되어 용서를 구하고 있는 내가 당황스러웠다. 억울하다고 투덜거리는데 낯익은 손길이 내 등을 토닥였다. 내 이성과 논리가 닿을 수 없는 지혜로 일하시는 분. 그 밝은 거울 앞에 처음 앉았던 날이 떠올랐다. 온갖 아픔을 다 털어버리고 나니, 다시 열일곱의 새벽 싱그러운 바람 속으로 온몸이 가벼웠다.  

  할아버지는 93세에 하늘나라로 가시기 며칠 전, 자녀들을 불러 모으고 기도를 부탁하셨다. 이제는 육체가 쉴 날이 되었다고 말씀하시고 본향에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마음속에 있는데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찾아내도록 기도해 달라고 하셨다.  

  며칠 후,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납덩이를 기도 중에 찾아냈다며 기뻐하셨다. 할아버지는 청년 시절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친척 집에 기거하신 적이 있었다. 언제나 남은 반찬에 찬밥이었다. 마음이 울컥해 "어디 잘 되나 봅시다."라는 마음을 품은 적이 있었다고 하셨다. 치기 어린 젊음이 잠시 이를 악물었던 마음도 천국에는 합당치 않았나 보다. 할아버지는 그 까마득한 옛일을 연약한 육체가 쉴 수 있는 마지막 호흡으로 깨끗이 털어내시고 평온하게 가셨다.

  해변의 아이들은 자유롭다. 짊어진 짐이 없다. 주변의 모든 것들과 더불어 조화롭다. 덤벼드는 파도와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과도 친구가 된다. 이제는 가야 할 때라고 그들을 부르면, 바다를 향해, 함께 놀던 친구들을 향해 서운한 듯 손을 흔든다. 안녕이라 말하고 내게로 돌아선다. 지어놓은 모래성, 속닥이던 이야기, 토라졌던 마음도 멀리 바다로 던진다.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명백해서일까. 두고 가야 한다는 것에 그리 개의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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